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수정(만화가) (문단 편집) === 만화가가 되기까지 === 1950년 7월 31일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5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사고로 다치면서[* 저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거나, 김수정이 성공할 때까지 아버지가 살아있었다는 말이 있지만 잘못된 정보다. 김수정이 어린 시절에 사고로 다쳐 집에서 지내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만 아버지는 유일하게 집안에서 만화가가 되겠다는 자신을 믿어주고 꿈을 잃지말라며 격려해주고 만화가가 되겠다는 아들을 너무나도 자랑스러워하셨으며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너무 그립다고 한다(둘리 애장판 1권 작가 인터뷰 및 월간 [[보물섬(만화잡지)|보물섬]] 1989년 12월호 참고).]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신문팔이, 껌팔이, 아이스케키 장사 등 날품팔이를 하던 시절을 겪었다. 그 와중에 초등학교 6학년 때 축구를 소재로 한 52쪽 짜리 만화책 <저 언덕을 넘어서>를 그려 만화와의 인연을 시작해 중~고교 때는 <금발의 토이>, <아라비안 나이트> 등을 그리는 한편 습작을 거듭해 꿈에 차근차근 나아가게 되었다. 그 시절 만화가를 한다고 했다가 큰 형과 말다툼하여 나중에는 죽어라 얻어맞았던[* 1950~60년대에 '만화'라는 것이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었는지 기억해보자. 그나마 형을 말리던 게 아버지였다. 어머니나 형들은 거지 꼴로 사는 것과 같다고 화냈지만 아버지만은 좋아하는 일을 하라며 만화가가 되고 싶어하던 그를 막지 않았기에 자신이 만화가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적도 있다. 이로 인해 가족들과의 불화가 심했고 두 차례 가출을 시도했으나 전부 실패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역전에서 깡패들을 만나 포기해 버렸고, 둘째는 김기백 화백[* 1935~2017. 본명은 김기태. 당대 유명 순정만화가 [[민애니]] 화백의 남편이며 본래 시사만화가에서 시작했으나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철도청을 풍자한 만화로 인하여 필화사건을 겪으며 아동만화가가 되었다. [[김영하(만화가)|김영하]] 화백이 그의 제자였으며 김기백도 당대 유명 만화가였다. 2017년 7월 11일 작고.]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상경하다 집을 못 찾아 포기한 것이었다. [[파일:external/pds27.egloos.com/e0006522_581dc30e966c9.jpg]] 1960년 초반에 나온 동물야구왕[* 이 만화는 김수정이 존경하는 만화가 차형(1940~ ) 이 동물을 의인화하여 그렸다. 그러나 차형 작가는 [[만화 검열제]] 항목에 나온대로 검열에 부딪치자 꽤 젊은 나이에 은퇴해버렸다....]이란 만화책에 나온 독자 코너에 어렸을 적 김수정이 보낸 그림(출처는 2012년 6월 8일자 KBS2 [[VJ특공대]]에 나온 고전 희귀만화를 3천 권이상 소장한 수집가 오경수가 모은 책). 결국 중고등학교를 마친 뒤 [[경상대학교]]를 중퇴하고 군 생활을 거쳐 겨우 [[1975년]]에 합동과 만화 독점에서 양대산맥을 이루던 소년한국일보 공모전에 낸 <폭우>가 당선되어 만화가로 데뷔했으나 도무지 벌어먹을 길이 없었다. 당시만 해도 신촌 대통령이라는 악명으로 유명하던 이영래가 만화가들을 대충 부려먹으면서 공장만화 체제를 갖추며 [[합동출판사]]라는 이름으로 만화계를 독점하던 시기였는데, 김수정도 여기로 갔으나 무시당했고, 그나마 편집장이 고향이 같은 [[강철수]]를 문하생이라도 하려고 소개시켜줘서 강철수를 찾아갔지만 강철수는 김수정의 그림을 보곤 그림은 40점, 글은 60점이라며 나가서 농사나 지으라는 모욕적인 말을 하며 거부했고, 김수정도 격분하여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다. 지금도 강철수와는 그다지 사이좋게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만화책을 냈지만 일본만화를 대놓고 [[표절]]해 그려야 했다. 덕분에 그림체부터도 도저히 김수정 그림체랑 다른 일본 작화체 야구만화라든지 여러 만화를 그렸는데 김수정 본인도 그야말로 치가 떨리는 기억으로 여겨 후회스럽다고 한다. 1978년경에 생계를 위해 윤성실업이라는 애니메이션 하청업체에서 일하나 창의성이 결여된 제작 환경에 환멸을 느껴 전기인두를 파는 세일즈맨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나마 기본급으로 월 10만원을 받았으니 공장 만화가와 애니메이터 때보단 훨씬 생활이 나아졌다. 하지만 스스로 말하길, 세일즈맨으로서 재능은 최악이었단다(…) 회사 일을 하다가 시간이 나면 공책으로 그림을 그리며 연습을 했는데, 친하게 지내서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던 후배 세일즈맨이 이걸 보고 그림이 아깝다면서 형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몇번이나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회사 술자리와 개인적으로 김수정에게 찾아와 한잔할때도 간곡하게 권유했다고. 결국 김수정은 3달만에 세일즈맨을 때려치고 만화가로 돌아왔다. 지금도 그 후배와 종종 만난다고 한다.[* <한국대표 만화가 18인의 감동적인 이야기(장상용 저)> p73~74 참고.] 당연하게도 가난은 늘 붙어있었다. 결국, 생활고를 못견디고 결혼을 약속했던 동거녀(전 아내)는 처가인 [[부산]]으로 돌아갔고 김수정은 겨우 차비를 빌려서 아내의 친정집으로 갔다. 그러자 아내의 오빠되는 이가 나와서 "돈도 못 버는 만화가 때려치지 않으면 내 동생 못 데려간다!"고 일갈했다고 한다. 이에 김수정은 '''"당신 동생은 포기해도 만화는 포기못한다"'''며 그냥 나와버렸고 집으로 올 차비도 없어서 노숙을 해버렸다고 한다. 결국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고 받은 돈 1,000원으로 서울까지 돌아올 차비 700원을 쓰고 300원으로 라면을 사서 배고픔을 달랬다고 한다. 어쩌면 이때의 갈등이 나중에 이혼 및 여러가지 가정적 일을 예고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활고 속에서 틈틈히 만화를 그렸지만 겨우 연재를 해도 원고료조차 못 받기 일쑤라서 돈이 없으니 당시 쌍문동 공동묘지 앞에 자리잡은 달동네같은 곳에서 살아야 했다. 그 와중에 동갑내기 친구이자 만화가 동료인 [[김동화]](본명:김종철)를 알게 되었다. 둘 다 턱없이 가난하던 시절이라 [[술]] 한잔 할 돈도, [[커피]] 한잔 살 돈도 없어서 어찌 시간이 나면 찾아온 김동화와 같이 공동묘지 근처 풀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만화와 여러 이야기를 했다고 회고했다. 반대로 김수정이 김동화가 살던 곳으로 찾아갈 때도 마찬가지라서 마포의 한 [[쪽방]]을 빌려 겨우 살아가던 김동화는 맞이할 곳이 없으면 근처 아파트 단지 풀밭 위에 누워서 서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김동화가 회고하길, "당시 수정이에게 하늘 바라보면서 '배고프고 돈 없을 땐 만화가 때려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냐?' 란 말을 하자. 수정이는 피식 웃으면서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서 ''''야, 돈을 보면 돈밖에 안 보이지만 작품은 계속해서 기억되기 마련이야'''' 지금 생각하니 그놈 참 명언 잘 남긴 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