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성근 (문단 편집) === 한국으로의 영주귀국 === 1964년 12월, 김성근은 일본으로부터 더 이상 비자 갱신이 되지 않자, 일본 거주권을 포기하고 영주귀국을 결심한다. 이때 김성근은 홀어머니와 친척, 친구들과 모두 생이별하고 홀로 [[대한민국]]으로 영주귀국하며 많이 울었다고 밝혔다. 그때 김성근은 한국에서 야구로 인정받아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해보겠다는 의지로 눈물을 달랬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여기서 논란이 나오게 되는데, 김성근이 영주귀국한지 두달 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면서, 가족들을 만나는 것에 전혀 지장이 없게 되었다.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했다는 1964년 12월은 한일 국교 정상화 추진을 제1의 국정 과제로 천명했던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에 취임한지 한달 후였고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한지 두달 여만에 한일 국교 정상화 기본 합의가 이루어졌다. 즉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했다는 1964년 12월이면 이미 한일국교정상화 논의가 크게 진전되어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또 보자면, 사실 운동이나 열심히 하던 20대 운동선수가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질지 도사마냥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운동선수가 시사 등에 어두운 것은 일종의 클리셰 수준인데 그 시기에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또 기본 합의는 이루어졌어도 일본이 64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첫 해이고 한국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도 않았으니, 국교가 정상화되어도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이에 대해 김성근 본인도 인터뷰에서 본인이 영주귀국한 직후에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에 대해 "내 인생에 참 어려운 고비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이상하게 잘 해결됐어. 참 운이 좋다고나 할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즉 김성근 본인의 말대로, 영주귀국을 결심했는데 마침 운좋게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고 왕래가 가능해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당대 시대상을 보면, 김성근의 가족도 처음에는 북한으로 가려고 했던 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재일교포는 총련계가 대다수였고 지금보다 훨씬 남북간 이념 대립이 격렬했던 그 시절, [[재일교포]]는 거의 북한 간첩에 가까운 취급이었다. 즉, 자유화는 되었어도 조국을 찾아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나 고문을 당한 재일교포들이 수두룩할 정도로 국가에서 환영받는 존재도 아니었고 이렇다보니 출입국 관리를 까다롭게 했던 시기였다. 즉 말이 좋아 국교 정상화지 말 그대로 국가간에 국교만 정상화하겠다 정도고, 해외여행은 자유화되지도 않았다. 해외여행 허가 자체로도 까다로운데 간첩으로 의심받을 소지가 다분한 일본, 한국간 허가가 나올지, 또 몇 편 있지도 않을 뿐더러 당시로서는 엄청난 가격인 한일간 비행기, 배삯을 마련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라 국교 정상화 이후에조차도 정말 만나는 것 자체는 쉽지 않았음은 분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