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성근 (문단 편집) === 승리지상주의 === 김성근의 매니징 스타일을 요약하자면 승리지상주의 야구라고 볼 수 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어떠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다. 명성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도구로 사용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러한 행태 때문에 온갖 구설수와 [[비판]]에 시달리면서, 더욱 성적에 집착했다. 과거에는 이러한 방식이 꽤 잘 통용되던 시기도 있었다. 김성근이 한국으로 영주귀국한 1960년대에는 인기에 힘입어 실업리그가 출범은 했지만 명색이 돈 받고 야구한다는 선수들이 변화구는 구경도 못 해본 선수가 태반에, 체계적인 몸관리 등도 제대로 모르던 때였다. 그 시절 김성근이 일본에서 배워온 방식은 무식하게 많은 훈련량으로 밀어붙이는, 지금 와서 보면 주먹구구나 다름없는 방식이었으나 그마저도 못 되던 프로 이전 실업야구 수준에서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혁신적이었고, 덕분에 실업 시절 명선수로서 다승왕, 국가대표로 이름을 날렸으며 감독으로서도 초창기 프로야구판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혹사 감독이지만, 이건 딱히 김성근만 그런 게 아니라 그 때는 정말 누구나 다 그랬다. [[장명부]]가 427이닝 30승을 거둔 게 프로야구 2년차고, [[최동원]]이 한국시리즈 7경기 중 5경기에 올라온 게 3년차였다. 미국이나 일본이라고 다를 것도 없는 게 저 당시 에이스인 [[이나오 카즈히사]], [[게일로드 페리]]같은 선수들은 지금 와선 상상도 할 수 없는 300이닝을 척척 먹어줬고[* 일본이나 미국이나 마지막 시즌 300이닝 투수가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인 1980년대에 나왔다.], 마지막 이닝만 책임지는 전문 마무리 투수가 최초로 등장한 것이 당시 한국프로야구 출범 7년차였던 1988년의 [[데니스 에커슬리]]이었을 정도로 마무리 투수가 3~4이닝 이상을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또한 그 당시에는 스포츠 의학, 관리같은 개념도 없었고 애초에 한국에서는 프로스포츠로 평생을 먹고 살 돈을 번다는 개념이 희박해서 젊었을 때 잠깐 하다가 금방 은퇴하고 소속팀 모기업에 취직하거나, 모아둔 연봉으로 가게를 열어 자영업을 하거나 하는 그런 시절이었기에 관리를 하는 방법도 몰랐고, 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김성근처럼 선수를 굴렸다간 30대 찍기도 전에 은퇴하게 되지만 그 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은퇴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기에 당시 기준으로는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샌디 코팩스]]를 최연소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만든 월터 올스턴,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를 3일 텀으로 6번씩 완투를 시킨 [[토미 라소다]]같은 감독이 메이저리그 명감독으로 칭송받던 시절이었다. 그땐 누구나 애초에 선수를 제대로 휴식을 주어가며 관리를 해 본 적이 없고, 그래야 할 필요도 몰랐으며 그게 문제인지도 몰랐다. 야구가 아니라도 당시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하루도 휴일이 없이 달에 2일 혹은 아예 못 쉬거나 일일 근로시간이 14~15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심지어 그게 불법도 아니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발암물질인 [[석면]]을 뭔지도 모르고 마스크도 없이 일하면서 마구 흡입해댔고, 야구도 그런 것이었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모두 터무니없는 일들이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어떤 사람의 행적은 반드시 그 사람이 살아온 시대적 배경과 함께 평가되어야 한다. 지금 기준으로 그 당시의 김성근을 평가하는 것은 [[베이브 루스]]나 [[타이 콥]] 같은 100년 전의 위대한 선수들을 변화구도 커브 한 종류밖에 없었던 시대에서 활동한 주제에 전설 대접 받는 범부, 세종대왕을 민주주의도 모르는 구시대적 왕조 체제 하의 독재자라고 평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에 태어나서 그들의 시대에 최고가 된 그들을 세상은 아무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 시대에 김성근의 방식은 몸관리는 커녕 프로의식이 덜 정착되어 그냥 타고난 재능으로 야구를 하며 남는 시간에 술 먹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던 많은 선수들에게는 필요한 것이기까지 했는데, 이것은 사실 지금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얘기다. 손민한이 [[임페리얼(위스키)|임페리얼 위스키]]에 떡이 돼서 토하고 나가 완봉했다는 이야기가 그리 먼 옛날이 아니고, [[NC 다이노스 원정숙소 방역수칙 위반 사건|선수들이 경기 끝나고 숙소에서 술마시다 코로나 집단 감염 사태를 터뜨린 게]] 2021년이었다. 지금도 한국 야구선수들은 철저한 몸관리는 커녕 흡연자 수도 적지 않다. 지옥훈련이 지나치면 그것도 문제가 되지만, 어느 정도는 훈련과 몸관리를 철저히 해 줘야 제 기량을 낼 수 있는데, 과거 실업야구 시절부터 현재까지도 한국야구계는 훈련을 지나치게 해서 문제라기보다는 훈련을 너무 적게 해서 문제라고 평가받는 여론이 많았다. 그러나 시대는 진보하면서 90년대의 [[토니 라 루사|라루사이즘]], 00년대에 화두가 된 스포츠 과학 등 과학이 진보하며 스포츠에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으며 스포츠 외적으로도 인권의식이 상승하였고 오히려 시대착오적 혹사보다는 적당한 휴식과 회복, 관리가 선수의 능력을 더욱 끌어내준다는 사실을 발견해내고 각종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었으나 김성근은 시대의 변화를 거부했다. [[한화 이글스]] 시절 [[권혁]]이나 각종 살려조의 투구는 김성근이 젊은 시절을 보낸 70~80년대 기준으로 보면 별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2010년대에는 야구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시대에 뒤쳐진 터무니 없는 행위여서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김성근이 사이코패스거나 뿌리까지 악인이여서 그런 기용을 한 게 아니다. 김성근 본인도 그런 혹사와 관리 소홀로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지만 그땐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본인이 젊었을 때 당연했던 것을 나이를 먹어서도 계속 했고 그냥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 구시대 야구인이었을 뿐이다. 아직 아마추어리즘과 적은 경기수, 미국이나 일본보다 발전이 늦고 최신메타의 도입이 늦은 한국 프로야구 환경 등 김성근에게 유리한 조건이 충분히 남아있던 SK 시절까지는 전임 감독이 물려준 풍부한 선수팜, 본인의 강훈련, 모기업의 대대적인 지원 등 여러가지 요소가 겹쳐 '야신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실적을 낼 수 있었다. 사실 대략 SK 때부터 혹사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며 시대와 조금씩 어긋나는 감이 있었으나, 김성근에게 유리했던 외적 조건을 바탕으로 결과적으로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에 이를 커버할 수 있었다고 봐야겠다. 그러나 김성근이 현장을 떠나 있던 대략 5년간 프로야구에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김성근식 불펜 짜먹기 야구는 이미 시대에 뒤쳐져 있었다. 특히 신구단 창단이 매우 크게 작용했는데, 그전까지는 1년 133경기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경기수로 불펜을 막 짜먹어도 그럭저럭 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김성근의 혹사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자세히 보면 망가진 선수는 대부분 1년에 한 명이지, 여러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망가진 경우는 한화 시절 정도밖에 없다. 1년에 한 명 정도만 작살나게 기용하면 성적도 낼 수 있고 불펜에서 1년 반짝하는 정도의 자원은 매년 나오기에 또 내년이면 다른 노예가 등장해서 그럭저럭 팀 전체의 전력은 유지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 유명한 SK 시절 김성근의 혹사로 탈이 난 선수는 [[전병두]], [[채병용]], [[고효준]], [[송은범]], [[김광현]] 정도고 장기 이탈자는 전병두와 김광현 2명이다. 채병용과 고효준은 각각 인대, 뼛조각 제거 수술 받고 공익 근무하러가서 사람들이 잘 모르고(채병용은 김성근의 전임 강병철과 조범현도 혹사시켜서 묻힌 감도 있다.) 송은범은 데드암과 잔부상, 그로 인한 극심한 기량 하락은 있었지만 큰 부상은 없었다. 사실 정우람도 다른 투수 같으면 망가지도록 기용하긴 했는데 운 좋게 역대급 내구성을 타고나 FA까지 무난히 먹었다.] 개중에는 [[정우람]]처럼 롱런하는 특이한 노예가 나오기도 했고. 1년에 한둘쯤 망가지는 선수는 나오지만 팀 전체의 투수력이 동시다발적으로 망가지지는 않았기에 혹사라는 비판은 일각에서 나와도 팀의 전체적인 전력은 유지하고 있었고, 어찌 됐건 팀 성적은 좋았으니 주류 여론이 되지는 못했다. 이것이 김성근의 SK 시절이었다. 그러나 한화 시절은 이미 10구단 체제로 들어서서 1군 출전가능 로스터 수는 일본보다 1명 적은데도 일본보다 많아진 경기수, 늘어난 팀 숫자로 인해 줄어든 투수 인재풀, 돌아온 빅볼메타로 인해 힘들어진 '지키는 야구', 기후변화로 폭염의 증가와 장마철에 우천으로 인한 휴식 확보가 예전보다 안 되는 등 온갖 조건이 다 김성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더이상 필승조 한 명을 불펜 노예로 쓰는 정도로는 시즌을 이끌어나갈 수가 없게 되었고, 3~4명을 동시에 망가지도록 기용해야 할 정도로 김성근식 야구는 힘들어졌다. 이렇게 되면 투수력이 시즌 후 회복이 되어서 김성근 물러날 때 정도까지는 어찌어찌 투수력이 유지되는 노예 1명 체제 때와는 다르게 팀의 투수력이 1년 정도로는 회복이 힘들 정도로 빠르게 망가진다. [[선동열]] 등 비슷한 불펜야구를 하던 감독들은 잘리거나 은퇴해서 뒷전으로 물러나고 새로운 메타에 맞는 젊은 감독들이 나타나거나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김성근은 자신의 옛날 방식을 고수했고, 결국 성적도 명분도 둘 다 잃은 채 잘리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나마 이런 소위 말하는 옛날식 불펜야구를 하던 감독들 중 오래 버틴 쪽이 [[김경문]]인데, 김경문은 오히려 타격면에서는 김성근이랑 정반대로 당시 메타에 딱 맞는 빅볼야구를 해왔고, 투수진도 거의 김성근 살려조급 혹사를 했음에도 김진성, 원종현, 이민호 등이 상식을 뛰어넘는 내구성을 보여주며 그냥 우연히(...) 오래 버텨준 덕에 김성근보다는 좀 더 성적을 내며 오래 감독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현역 시절에는 명선수로, 감독 시절에는 명감독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의 옛날 방식을 고집하다가, 비슷한 길을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오명을 뒤집어쓰고 물러나게 되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 비결을 옳은 것이라고 믿고, 자신을 잘 바꾸려 하지 않아서 점점 시대의 변화에 도태되기 시작하고, 또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방식대로 성공한 사람들이 등장하며 사라져 간다. 김성근도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2021년에도 '타협을 하면 안된다', '한계를 넘어야 한다', '[[https://youtu.be/zywDGL2rBzo?t=530|시대는 변해도 조직이 룰을 바꾸면 안된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점에서 김성근은 결코 자신의 철학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물론 초,중,고 야구부에서 최고의 선수들만 모은 엘리트 선수들을 통제하려면 이러한 에고가 필요하기도 했고, 김성근을 겪었던 선수들 중에는 김성근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선수들은 많다. 객관적으로 그러한 훈련과 기용이 선수의 기량을 향상시키고, 오랜 선수 생활을 보장해줬는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김성근은 무자비한 훈련과 혹사, 그리고 꼼수를 성과로 합리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역으로 한화 이글스에서 그 성과가 무너졌을 때 김성근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야구 내적인 평가와 별개로 프로야구 선수의 [[팬 서비스]]를 중요하게 여겼다. 프로선수는 팬 서비스보다 성적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시대에도 이미 김성근은 팬 서비스를 소홀히 할 경우에 벌금을 내는 내규를 선수단에게 지키게 하는 등 팬 서비스에 대해 선수들에게 철저히 교육시켰다. 그리고 야구팬들의 평가 외로 선수들의 평가는 희한할 만큼 높다. 어느 정도 립서비스는 필요한 언론 인터뷰는 차치하더라도 한때 김성근 감독 밑에서 뛴 [[박현준]]이 [[LG 트윈스 갤러리]]에서 썰을 풀었을 때도 선수로 거쳐가면 존경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는 등[* 심지어 박현준은 김성근 감독과의 불화설로 인해 트레이드되었고, 경기 중 김성근 감독을 도발하려고 로진을 과하게 불어대기까지 했던 인물이다.] 팬들의 평가와는 별개로 야구선수들에게 인망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화 부임 초창기인 2015년 전반기까지는 야구 팬들 사이에서 '야신' 등 극도의 신격화가 성행했다면, 이후 약 7년간은 극도의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한 점. 김성근의 감독 스타일과 전술은 말년까지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한국 프로야구의 환경 변화나 그의 극단적인 명암을 상징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한국 야구팬들의 냄비근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2018년 이후 계속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간간히 인터뷰하는 걸 제외하면 논란이 줄어들었고 나이가 나이인지라 앞으로 새로운 감독직을 수락할 가능성도 적어 보이며, 한화 감독에서 경질된 지 시간이 흐르면서 [[한화의 김성근 감독님 사랑해|한화 시절 응원가가 재발굴되고]] 김성근의 철학의 밈화[* 지옥 [[펑고]], ~은 ~할 수록 강해진다 등] 등으로 여론이 많이 완화된 것도 없지 않아 있다. 물론 당연히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여전히 심하게 호불호가 갈려 농담으로라도 김성근 복귀를 말하는 순간 팬들의 뭇매를 맞을 수 있었다. '감독'으로서의 김성근보단 '밈'으로서의 김성근이 대세가 된 셈. 어찌보면 대한민국의 6.25 전쟁 이후 '''노력, 혹사에 대한 각 세대별 가치관, 변화하는 시대와 그에 따른 갈등을 야구로써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김성근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야구 뿐만 아니라 60~70년대는 모든 분야에서 무조건 혹사시켜가면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하면 성공할 수 있었던 시대였고, 그것이 80년대까지 쭉 이어져 오다가 1997년 외환위기로 전환점을 맞게 되고 역성장이 이어지며 공부, 노력에 올인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성공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고, 가치관의 다양화 및 구세대간의 갈등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