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부식 (문단 편집) === [[사대주의]]자? === 김부식은 유명한 [[공자]] 빠돌이이기도 했다. 왕이 국학에 방문해서 공자에 제사지낸 것을 칭송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공자에 대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하행국학표'를 저술했으며 공자에 대한 찬사인 '중니봉부'[* 중니는 공자의 자로 공자를 [[봉황]]에 빗대어서 칭송하면서 자기도 공자의 뜻을 따르고 싶다는 글이다.]를 지어서 자신의 팬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런 공자를 극도로 좋아했던 점도 김부식이 모화주의자라는 평가에 불을 지폈던 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유학자로써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다. 애당초 고려의 정치제도 자체가 유교를 기반으로 했던 것을 생각하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당장에 전 세대의 [[서희]]나 [[강감찬]], [[윤관]]부터가 유교 경전을 공부하여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오른 유학자들이었고, 특히 윤관은 [[고려의 여진 정벌|여진과 싸우는]] 진중에서도 경전을 휴대하고 탐독했을 정도로 유학을 좋아하고 꾸준히 연마하던 인물이다. 때문에 김부식이 그렇게까지 두드러지게 공자를 모화했다고 볼 수는 없는 편. 실제로 공자를 좋아했다지만 정작 고려왕조 유학자들에게 있어서 [[정관정요]]가 문화로 자리잡아 순자의 이론에 따라 행한 사람이 많고 더욱이 이 시대의 유교는 굉장히 호국적인 성향을 띄어 대체로 유학자들이 고려 초,중기에 전란과 반란에 개입하는 일이 꽤 많았다. 이름부터 송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소식(시인)|소식]]([[소동파]])에게서 이름을 따온 탓인지 그러한 선입견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게다가 동생 이름조차도 소식의 동생인 소철에게서 이름을 따와서 김부철이다.][* 그러나 비슷한 예로 일본의 미나모토노 요시미츠도 신라명신의 신사에서 성인식을 한 뒤 신라사부로라는 아명을 부여받았으나 이를 두고 미나모토가문이 신라에게 사대했다고 비난받지는 않는다.] 대표적으로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라고 비난한 사람이라면 단재 [[신채호]]가 있다. 하지만 [[조선상고사]]에 김부식이 국사를 사대주의적인 《삼국사기》에 집약하고 당시 전해지던 다른 사서들을 말살했다고 적고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며 수십년 후 이제현, 일연의 시기 혹은 백여년이 지난 조선 초기까지도 《삼국사기》 이전 시기의 사서들이 여럿 전해지고 있었고 인용되었다. 애초에 '''사대라는 것 자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다른 나라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개념이 아니다.''' 상대가 우리 국력보다 훨씬 강한 대국인 만큼 맞서기보다는 차라리 비위나 맞춰주면서 얻을 것만 얻어내자는 논리다. 현실적이고 보수적이기는 해도 [[매국]]이나 나라의 정체성을 파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인 셈.[* 오히려 김부식은 조선시대에 와서는 제후국이면서 세가가 아닌 천자국의 역사인 본기를 쓰는게 불손하다는 식으로 까였다. 어떤면에서는 자주적으로 보일 수도 있어 미묘하다.] 또한 김부식은 중화 추종이 아닌 철저히 실리를 챙기는 행보를 보였는데, 송이 아닌 북방 오랑캐로 보던 금에 사대를 하자는 [[이자겸]]의 주장에도 크게 반대를 하지 않았고, 고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남송에 대해서는 대놓고 거절하는 모습도 보였다. 일각에서는 [[칭제건원]]과 [[서경(고려)|서경]] 천도 운동의 [[묘청]] 일파들을 몰살시켰고, 신라 외의 고구려와 백제 등의 기록이 적다는 이유로 중국의 사서인 [[수서]] 등을 [[복붙]]했다고 심히 비판하기도 하는데 이건 한쪽으로 지나치게 편향되어 평가한 것이다. 일단 고려는 [[외왕내제]] 국가로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했으니 비록 연호는 공개적으로 쓰지 않았지만, 소극적으로나마 칭제를 했던 국가였다. 서경 천도 운동의 경우, [[정지상]]과 [[묘청]]등은 서경으로 천도한 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탈환하자는 주장을 펼쳤는데 당시 [[금나라]]는 백여년 간 [[고려]]의 상국이었던 [[요나라]]와 몇 배는 더 높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자랑하던 [[북송]]을 연달아 관광태우며 중원의 북부와 만주를 완전히 정복한 강대국이었다. 이런 나라를 상대로 북벌을 주장한 것은 당시로썬 허무맹랑한 소리였던 셈.[* 거기다 당시 고려는 여진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어차피 쳐봤자 이득은 별로 없이 북송 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이라 그리 내키는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강동 6주를 얻은 이상 어지간해서는 침략을 받더라도 방어하기 어렵지도 않았으니 굳이 전쟁을 먼저 벌일 필요가 없었던 셈.] 멀리까지 안가도 묘청의 난이 일어나기 30여년 전인 1108년에 [[고려의 여진 정벌|금나라의 조상들을 상대로 17만의 고려 원정군이 고전한 사례]]도 있었다. 또한 서경 천도 운동의 경우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 출신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주도한 운동으로 표면적으론 황제국이 되어 옛 고구려 땅을 되찾자였으나 들여다 보면 김부식을 비롯한 기존 [[개경]] 출신의 정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정치 주도권 싸움에 더 가까웠다. 또한 중국측 기록을 많이 참조했다고 비난한 것은, [[삼국사기]]를 제대로 들여다 보지 않은 이들의 비판이다. 후술하겠지만 삼국사기 내내 "기록이 없어서 아쉽다.", "이렇게 [[안시성주|대단한 인물]]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 통탄하다." 같이 김부식이 살던 시절엔 이미 고구려와 백제측의 기록이 싸그리 증발해버린 상태였고, 이에 따라 김부식도 어쩔 수 없이 중국측 기록을 인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삼국사기]]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명칭을 이어받았지만, 사마천처럼 김부식이 집에서 홀로 만든 사서가 아니라 왕의 명령을 받아서 편찬작업을 시작했으며, 김부식은 지휘와 감독을 맡아서 완성된 후에는 조정에서 왕과 대소신료들이 편찬내용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보면 김부식을 단순 사대주의자로 보기엔 어려운 면이 꽤 많다. 물론 《삼국사기》가 좀 보수적인 내용인 것은 맞지만 "고려시대의 역사서들이나 《삼국사기》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 《[[구삼국사]]》 등의 내용을 현재 추정하는 것과 비교해서, 《삼국사기》는 보수적인 사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 성급한 주장이다. 구삼국사의 경우에는 허무맹랑한 기록조차 모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사기》는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원칙에 의거해 "사실로 확인 될만한 기록"만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을 인정해버리면 좋아할 세력[* 환자 계열 추종자라거나, 일본이라거나, 중국이라거나 꼽아보면 꽤 많다.]이 좀 많아서 대놓고 언급을 하지 않을 뿐이다. 마땅히 다른 사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의 성향을 대놓고 보여주는 것은 본론 자체가 아닌 사론이다. 《[[사기(역사책)|사기]]》에서 [[사마천]]의 말이 태사공왈 로 나타나는 것처럼,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의 의도 역시 사론으로 나타난다. 신라 중심 사관이 나타난다는 지적도 무리한 주장이다. 삼국사기에서 신라 역사의 비중이 과다하게 큰 것도 아니며, 비교적 균형있게 다루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삼국사기]] 본기를 보면 알겠지만 4세기까지의 경우 신라 본기는 고구려 본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또한 김유신의 기록과 같은 일부 내용들은 김부식이 사료를 찾다 찾다 끝내 포기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김유신]] 행장 등을 정리해서 써야 해야 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이 부분은 [[삼국사기]]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사대주의자라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김부식은 중국과 다른 '''한반도 고유 문화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삼국사기를 통해 엿볼 수 있는데 몇가지를 찾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 가장 확실하게 알수 있는 것은 바로 '''삼국의 역사를 [[제후]]가 아닌 [[황제]]의 역사에 해당하는 '본기'(本紀)로 구성'''하였다는 점이다. 참고로 이후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는 《삼국사기》와 같은 기전체 형식을 따랐지만 고려의 역사를 본기가 아닌 세가(世家), 즉 [[제후]]의 역사로 기록하였다. "고구려사가 어디에 귀속되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해 진행 중이지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존재로 인해, 고구려사는 중국사가 아닌 우리의 역사로 남을 수밖에 없다.[* 보통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은 그 나라의 정통성을 증명할 가장 큰 증거로 본다. 더구나 본기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자주성이 더 크게 나타난다.] * 또한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 군자는 기이한 것을 쓰지 말아야 하며, 없는 이야기도 지어내어선 안된다.]에 의거해 저술한 《삼국사기》에서도 정작 [[동명성왕|고구려 시조]], [[박혁거세|신라 시조]]의 탄생 설화를 기록해 두었다. 또한 각종 당시 한반도의 기이한 설화들을 기록해두며 "믿지는 못하겠는데 일단 전해지니까 기록해둡니다."라고 각주를 달아놓기도 했다. * 중국측 기록과, 한반도 기록이 서로 엇갈릴 때는 한반도 국가의 기록을 우선시했다. 예를 몇가지 들면 * [[경덕왕]] 본기의 왕의 사망 기록에 "우리쪽 기록에는 경덕왕이 765년에 사망했다고 나오는데 [[구당서]]랑 [[자치통감]]에는 767년에 죽었다고 나오는데 중국쪽 기록이 잘못인거 같은데?"는 각주를 달아놓았다. * [[태조대왕|태조왕]] 본기에는 "[[후한서]]엔 태조왕이 121년에 죽은 걸로 나와있는데 (우리쪽 기록인) [[구삼국사|해동고기]]기록에 따르면 121년엔 재위 69년째라 멀쩡히 살아있었음. 이거 중국쪽 기록이 잘못된거 같은데?"라는 각주를 달아놓았다. * [[유리왕]] 본기에 고구려측 장수 [[연비]]가 엄우에게 머리를 베여 머리가 왕망에게로 보내졌다는 기록을 적어놓으면서, 주석으로 "『한서(漢書)』와 『남북사(南北史)』에서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고 이른다."는 내용의 글귀를 달아놓았다. * [[거서간]], [[마립간]] 같은 [[고유어]] [[왕호]]는 촌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이걸 [[제왕연대력]]에서 모두 '왕'으로 바꿔 썼던 [[최치원]]을 비판하는 논평을 넣었다.[* 물론 최치원이 촌스럽다고 왕이라고 바꿨다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김부식|사관]]이 논평한다. >신라왕으로서 거서간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차차웅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이사금이라 칭한 이가 열여섯 사람, 마립간이라 칭한 이가 네 사람이다. '''신라 말의 이름난 유학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에서는 모두를 왕이라 칭하고 거서간 등으로 칭하지 않았다.''' 혹시 그 말이 천박하여 칭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겨서일까? 『좌전(左傳)』과 『한서(漢書)』는 중국의 역사책인데도 오히려 초(楚)나라 말인 ‘누오도(穀於菟)’,[* 사실 이건 인명이라서 당연하지만.] 흉노(匈奴) 말인 ‘탱리고도(撑犁孤塗)’ 등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신라의 일들을 기록함에 그 방언을 그대로 쓰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본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86&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지증 마립간]] * 중국에 항복하고 [[고구려]]를 멸망하게 한 [[연남생]]과 [[연헌성]]을 '남생, 헌성은 당나라에는 공신일지 몰라도 우리 입장에서는 반역자다.'라고 사론에서 평가했다. * [[주필산 전투]]에 대해서도 "중국 사서에는 별다른 언급이 안되어 있는데, 내가 찾아보니 당나라 놈들도 고구려 만큼 피해를 크게 입은거 같단 말야. 중국애들이 쪽팔려서 안쓴게 아닐까?."라며 중국사를 디스하기도.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서는 ‘주필산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여 그 군사가 바야흐로 40리나 뻗쳤다. 태종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황제의 6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되어 거의 꼼짝 못하였네. 영공([[이세적]])의 휘하에 있는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척후병이 보고하였을 때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네.’라고 하였다. 비록 끝내는 스스로 탈출했으나 저와 같이 겁을 내었거늘 '''『신ㆍ구당서』나 사마공(司馬公)의 『[[자치통감]]』에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쪽팔림|나라의 체면 때문에 말하기를 꺼린 것이 아니겠는가.]]''' >---- >《삼국사기》 * 《삼국사기》 진삼국사표에선 "하물며 생각건대, 신라ㆍ고구려ㆍ백제가 나라를 세우고 솥발처럼 대립하면서 예를 갖추어 중국과 교통하였으므로, 범엽(范曄)의 『한서(漢書)』나 송기(宋祁)의 『당서(唐書)』에는 모두 열전(列傳)을 두었는데, 중국의 일만을 자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히 하여 갖추어 싣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고기(古記)라는 것은 글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事跡)이 누락되어 있어서, 임금된 이의 선함과 악함, 신하된 이의 충성과 사특함, 나라의 평안과 위기, 백성들의 다스려짐과 혼란스러움 등을 모두 드러내어 경계로 삼도록 하지 못하였습니다."라면서 '''중국이 남의 나라 역사까지 왜곡을 한다는 것을 맨 처음 알린 사람이다.''' * 당 태종과 대결해서 끝내 승리를 거둔 [[안시성주]]에 대해선 대단히 용기 있고 지략이 뛰어난 장수라고 극찬하고 있으며, 그런 장수의 이름이 후대에 알려지지 않음을 크게 아쉬워하고 있다. * [[을지문덕]] 열전을 보면 [[수서]]의 기록을 상당수 인용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교묘하게 평론을 사이사이에 끼워 넣어 을지문덕의 위대함을 칭송하고 있다.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80708&page=2|관련 글]]을 참고하자. 정리하자면 '''김부식은 개인적으로 중국의 문화를 깊이 흠모했던 모화주의자였던 건 사실이지만 사대주의자라 보기는 어렵다.''' 학자로서의 김부식은 유학의 대가답게 모화주의의 면모가 있지만 정치가로서의 김부식은 현실주의자였다. 묘청이 금나라를 공격해 우리의 옛 땅을 되찾자는 이상적 자주주의자라면 김부식은 현실적으로 지금 고려의 국력으로 창성하는 금나라를 적으로 돌리면 이득이 될 게 없으니 차라리 금나라와 관계 개선을 통해 국익을 얻어내자는 현실적 자주주의자였다.[* 사실 당시 설령 금나라를 친다고 한들 고려 입장에서는 딱히 이득될 것이 없었다. 단독으로 쳐봤자 금을 완전히 만주에서 몰아내는 건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송과 연합한다고 해도 송이 먼저 금을 공격하지 않는 이상 송만 좋은 일 시켜주는 꼴이다. 당시 송은 연운 16주를 되찾으려면 고려의 협력이 필요했지만 고려는 그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급한 땅도 없었다. 이전에 금나라 이전에 요나라가 점거하고 있던 압록강 동쪽에 보주성을 요금 교체기에 고려는 점령하고자 하였는데, 이곳 성 하나 점령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당장에 금나라가 이를 핑계로 전쟁을 할 수도 있지만, 그냥 넘어가줬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금나라와의 전쟁을 할 상황도, 명분도 없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묘청과 김부식 간의 대결은 자주 대 사대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간 싸움이라 보는 것이 옳다. 흔히 사대주의와 모화주의를 합쳐 사대모화라고 하기 때문에 양자가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둘은 구분되어야 한다. 김부식은 모화주의자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중화 왕조를 섬겨야 한다는 [[삼학사]] 같은 고지식한 사대주의자는 아니었다. 아니 그랬다면 송을 위해 금을 공격하는걸 찬성했을 수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