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범수(기업인) (문단 편집) == 창업 == 1990년대 말 PC방과 온라인 게임 열풍이 불자, [[삼성SDS]]에 재직 중이던 1998년 6월 김범수는 현재 카카오 대표 남궁훈과 함께 [[한양대학교]] 앞에 '미션넘버원' 이라는 대형 [[PC방]]을 창업한다. 법인명은 미션엔터테인먼트. 전국 최대 규모의 PC방인 데다 그는 한 자리에서 모든 컴퓨터를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해 개업 6개월 만에 5천만 원을 벌 만큼[* 소비자물가지수 변동에 의한 화폐가치 계산에 따르면 2022년의 8,790만원 상당. [[https://kostat.go.kr/mondyValueCalc.es?mid=b70302000000|#]]] PC방은 승승장구했고 PC방 운영을 아내에게 맡기고는 1998년 9월 삼성SDS를 나왔다. 김 의장은 그해 연말인 1998년 11월 [[강남구]] 삼성동에 '''[[한게임]]'''을 창업했다. [[https://seoul.co.kr/news/newsView.php?cp=seoul&id=20141006015002|#1]] [[https://www.news1.kr/articles/?3878003|#2]]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dimg.donga.com/63782681.1.jpg|width=100%]]}}} || || 합병을 발표하는 김범수. 왼쪽은 [[네이버]] 창업자 [[이해진]]이다. || 김범수는 2000년 [[한게임]]을 삼성SDS 동기 [[이해진]] 사장의 [[네이버]]와 합병시키고 [[NHN(구)|NHN]] 공동대표가 된다. 합병 직후 김범수는 한게임으로 [[일본]]에 진출하기로 결심했고 일본시장에서 3200만명의 회원을 확보하는 등 일본에서 가장 먼저 자리잡은, 성공한 한국형 포털이 되었다.[[https://www.etnews.com/200912110134|“세계 네티즌 15%가 회원 글로벌 韓게임 축배 든다”]] 이후 2004년 [[NHN]] 단독대표를 거친 이후 해외사업을 총괄하는 대표를 맡는다. 그러다 2007년 8월 대표직을 내던진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해진과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 많은 돈을 받고 네이버를 나오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초창기 인터넷 기업이 큰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네이버]]는 검색 엔진과 서버에 많은 투자가 필요했고, 그 투자금은 한게임에서 번 돈으로 메꿨다.] [[NHN]]에서 나올 때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닙니다.”라는 말을 남겼다.[[https://news.nate.com/view/20210512n03728|“한게임재팬부터 꿈꾼 김범수의 '글로벌 항해' 콘텐츠 심장부 북미 노린다”]] 그 후, 김범수는 다 털고 가족이 있던 [[미국]]으로 떠났다. 자녀들과 놀아주고 학교 데려다주면서 1년을 보냈다. 그는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혼자 다시 귀국해 음악에 빠지고, 책에 빠졌다. 김범수는 너무 외로워서 "1년만 휴학하고 한국서 놀자"고 [[미국]]에 있던 가족들을 설득했다. 당시에 큰 애는 고1, 둘째는 중3이었는데 ''' '나도 재수했는데, 애들이 1년 정도 늦게 대학가면 뭐 어떤가' ''' 싶어서 식구끼리 여행다니고, [[당구]]치고, [[PC방]]에 다녔다고 한다. 더 무서운 건 이때 애들한테 아무것도 못 하게 하고 강제로 놀게만 했다고 한다. 식구 중에 딸이 게임을 별로 못했는데, 아들과 게임 고수인 아내의 지도로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고 한다. 그렇게 넷이서 게임을 하다보면 시계는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PC방]] 주인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면 그게 정말 행복했다고 한다. 그렇게 [[가족]]과 놀기를 3년, [[iPhone]]이 출시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가족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카카오톡]]이 탄생한다.''' 본인이 미국에 있을 때 마침 [[아이폰]]이 출시되는 것을 보며 PC에서 모바일 시대로 옮겨갈 것을 짐작, 한창 준비하던 프로젝트를 무산시키고 위와 같은 서비스를 출시했다. “[[TV]]에서 PC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오는 큰 흐름이 있었다. 거기서 스마트폰 시대에는 무엇을 하면 좋을지 원론적 질문을 주고받았다. 결국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답을 얻게 됐고 전방위적으로 여러 앱을 출시한 뒤 어떤 게 성공하는지 지켜보려 했다. 딱 2개월 뒤 [[카카오톡]]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고 카카오톡에 올인했다.” (2016/07/27, 조선비즈 인터뷰) [[카카오톡]]은 PC메신저 일색인 시장에서 '모바일 메신저'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무료 서비스와 그룹채팅의 강점을 내세운 카카오톡은 출시 1년 만에 1,000만 명의 이용자를 모았다. 당시 카카오톡이 급속도로 성장했던 이유는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동통신사]]의 문자 메신저는 글자수 제한이 있었던 건 둘째 치고 별도의 통신비를 엄청 지불했어야 했다. 카카오톡은 인터넷에 연결만 되면 글자 제한 없이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었고, 후에 출시한 이모티콘과 부가 기능들이 유명세에 불을 붙여 흥행을 이끌었다. 현재는 [[네이버]]의 [[라인(메신저)|라인]]과 [[페이스북]]의 [[페이스북 메신저|메신저]] 등 만만치 않은 경쟁사들이 있지만 2014년까지도 경쟁사들의 성장이 더딜 때라서 김범수 의장의 시장 선점이 한몫 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당시를 보면 매우 과감하고 급진적인 투자이고 사업이었다. 통신사 입장에서는 문자 메신저 또한 통신망 투자를 한 상태에서 수익원이 되는 것은 당연한데, 카카오톡은 그것을 무료로 해주었던 것. 사용자 입장에서는 문자 메신저가 공짜여서 좋기는 한데, 서비스를 제공하는 카카오톡 입장에서는 매달 10억 원 이상의 서버 투자 비용이 계속 들어갔다. 네이버 합병으로 벌어들인 투자금이 없었다면, 시작조차 하기 어려운 사업이었다. 김범수는 [[카카오톡]] 초창기에 단 한푼의 수익도 없이 서버 투자로 매달 10억 원 이상씩 돈만 쓰고 있었다. 다만 SDS와 [[한게임]] 등을 통해 인터넷 사업을 영위해온 그간 경험에서 사람이 모이면 반드시 돈이 된다는 신념만을 믿고 지속적으로 투자금을 쏟아부었다. 이후 김범수 개인 돈마저 고갈되고, 카카오톡 사용자들은 메신저 렉 걸린다고 아우성이 들리는 상황이 되고, 결국 중국 [[텐센트]]에서 투자금을 지원받아 지속적으로 투자를 넓힌다.[* 이때 투자한 중국 기업 [[텐센트]]는 당시 투자를 통해 메신저 운영 노하우를 익혀서, 문자 메신저 QQ를 통해 중국의 국민 메신저 회사로 발돋움하고 이를 기반으로 모바일 페이, 인터넷 게임회사, IT 투자회사 그리고 마침내 중국 시가총액 1위 기업이 되었다. 텐센트 창업자도 [[중국]] 시가총액 1위 기업의 시작이 카카오톡 벤치마킹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점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텐센트가 [[카카오]]에 투자해서 명분을 확보했기 때문이지 안그랬으면 짝퉁 이미지로 떳떳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텐센트도 성장 과정에서 투자금이 필요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기업으로부터 투자를 받았고, 심지어 현재 텐센트 최대주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적의 기업 [[Naspers]]이다.] 다만 김범수의 막대한 돈, 텐센트의 투자금 계속 비용이 발생될 무렵, 카카오톡이 전 세계에서 최초로 메신저로 수익이 날 수 있는 아이템을 만들어냈는데, 카카오 게임을 통해서 메신저 사업에서 수익 창출 모델을 최초로 제시하였다. 이후로는 선물하기 기능 등등. 이후 김범수의 전략대로 인터넷에서는 사람이 모이면 돈이 된다는 이야기는 정설로 법칙처럼 되어버렸다. 카카오톡의 성공 모델을 보고, 네이버 이해진은 [[일본]]과 동남아 국가들(태국, 인도네시아 등)에 라인을 기반으로 한 메신저를 재빨리 론칭했고, 중국은 QQ를, 전 세계에서 가장 발빠른 [[이스라엘]] 기업도 메신저 회사를 만들었으나, [[페이스북]]이 빠르게 인수한다. 이후 2014년 [[다음]]과 합병한다. 한때 그의 주 파트너가 경쟁사였던 [[네이버]]였음을 감안하면 합병이긴 해도 경쟁사와 인연을 맺은 것이 시대의 아이러니이다. 카카오는 처음에는 무료 서비스라 게임 업체와의 연동에 주력해 수익을 냈지만, 이후 준비했던 유료 서비스들과 [[카카오뱅크]] 등 인터넷 은행 사업이 대대적으로 성과를 내면서 2019년, 자산총액 10조 이상의 [[대기업]] 기준을 만족하며 '''9년 만에 대기업이 되었다.''' 그는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성공비결을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삼성SDS]]를 뛰쳐나와 한게임을 만든 것, 한게임을 네이버와 합병시킨 것, 네이버를 떠나 미국으로 간 것, 모두 환경을 변화시킨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강제적으로 환경에 변화를 준 것이 내 성공의 비결이었습니다.” [[https://www.businesspost.co.kr/BP?command=article_view&num=290741|#]] 2020년대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활동이 늘어나고 IT기업 붐과 IT기업 주식투자라는 호재를 타면서 더욱더 계열사를 확장해나갔고 카카오 공화국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카카오를 문어발식 대확장을 해나가며 국내 시장을 잠식해나갔다. 그러나 코로나에서 위드코로나로 전환된 것과 IT거품이 사라지고 본업인 카카오톡의 데이터를 자사가 아닌 외주업체에 저장했다가 그 업체에 화재가 발생해 먹통이 되는 사건으로 카카오 그룹의 독과점 현황에 대한 심각성을 느끼게 되면서 정부는 물론 여론이 적대적으로 변화하였다. 이후 카카오 그룹은 공정위의 대대적인 견제와 본업을 도외시하고 사건사고가 막 터지는데다가 하이브와의 SM엔터테이먼트 그룹 인수전에서 시세조작한 정황까지 발견되어버린다. 시세조작이 사실로 밝혀지면 카카오뱅크 대주주 자격이 박탈될 처지에 몰리면서 김범수 센터장과 카카오의 최대위기라는 말이 돌고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