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두봉 (문단 편집) == 여담 == * 같은 항일운동가였으며 월북한 인사인 약산 [[김원봉]]과 이름과 행보가 비슷해 헷갈리거나 친척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이름에 들어간 '봉'자를 돌림자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김두봉의 '봉'자는 받들 봉(奉)이고 김원봉의 '봉'자는 봉황 봉(鳳)이다. 대신 둘이 인척 관계이긴 했다. 김두봉은 김원봉의 본처 박차정[* 부산 출신의 여성 항일운동가.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생가와 동상이 있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의 외당숙이었다. 박차정은 김두봉의 5촌 조카인 셈. 생전에 김원봉에게 "내 조카 차정이는 갔지만 약산은 언제까지나 내 조카 사위"라고 말하기도 했다. * 한편 김두봉이 어느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하거나 이름을 올린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김두봉은 연안으로 가기 전까지는 [[사회주의]]와는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와 대립했다고 한다. [[상하이]]에 있을 때는 한때 인성학교의 교원으로 활동하다 인성학교 교장에 추천되었는데 한번은 공산주의자들이 학교를 집회 장소로 허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김두봉은 신성한 교육 장소를 정치적인 투쟁장으로 쓰도록 허락할 수 없고 남의 나라 조계 안까지 와서 정치 투쟁을 하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라며 이를 거부했었다. 김두봉의 거절에 앙심을 품은 공산주의자들은 집단으로 김두봉과 인성학교를 비난하는 성토를 했다. 이에 격분한 김두봉은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며 그들에게 학교를 빌려주는 것을 거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한다. * 그가 나고 자란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현재는 [[부산광역시]]로 편입됨)는 [[김해 김씨]] 일파의 집성촌으로 이 지역 출신의 친척 중 항일 운동과 관련된 사람이 많았다. 제1공화국 초대 [[국회]] 부의장을 지냈고 [[한국 전쟁]] 당시 월북한 [[김약수]]는 그의 6촌 동생이다. 김약수는 개명한 것으로서 본명은 김두전(金枓全). 두(枓)가 돌림자이다. * 그가 북한의 언어 정책을 주도할 때 대한민국의 언어 정책을 주도한 [[최현배]]와 [[주시경]]의 제자로서 동문이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남북한의 언어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는 설이 있다. 북한의 한글 정책을 담당할 당시 한글을 [[알파벳]]과 같이 [[풀어쓰기]]로 적자고 주장하였으나 실현되지는 않았고 그 대신 조선어 신철자법을 제정하면서 2종류의 옛 자모와 4종류의 새 자모를 도입했지만 실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았고 김두봉이 실각된 후에 김일성이 이를 폐기하였다고 한다. 최현배와는 광복 이후 다른 길을 걷기는 했지만 젊은 시절에 서로 아는 사이였고 꽤 친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db.kookje.co.kr/L20150909.22006183928i3.jpg]] * [[김구]]와도 인연이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함께 일하기도 했고 [[태평양 전쟁]] 말기에 연합 작전을 구상하기도 했다. 위의 사진은 김구의 부인 [[최준례]]가 사망하였을 때 김두봉이 만들어준 무덤으로 순한글로 써진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인연을 바탕으로 김구는 1948년 남북협상 때 김두봉을 형(인형(仁兄), '어진 형')으로 칭하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친족 관계가 아닌 경우 형이라는 호칭이 좀 애매하다. 원래 구어체에서는 남녀 불문하고 손위 사람을 '언니'라고 불렀다. [[드라마]] [[추노]]에서 잘 묘사되어 있으며 '졸업식 노래'의 첫 소절도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인데 여기서 언니는 남녀 불문한 손윗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다. 그러다가 근대에 형이라는 호칭이 등장했다. 이 호칭은 가벼운 존중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게 동년배간에, 손위가 손아래에게, 손아래가 손위에게 사용된 예가 모두 존재하는 마법의 단어이다. 그래서 나이가 많은 김구가 훨씬 나이 적은 김두봉에게 형이라고 불렀다 해서 숙이고 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편지글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족하]]나 [[좌하]] 같은 [[서간문]] 어투가 아니라 평상문의 친근함을 과시하려고 저렇게 썼을 수도 있다. * 1961년 [[장면 내각]]이 남북 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홍명희]]와 함께 김두봉을 남한으로 초청하려 하기도 했다. 이미 숙청되어 협동 농장에서 노역하고 있던 시기 또는 사망한 시기이므로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그가 해방된 뒤 약 15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남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로 명망이 있는 인사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굿바이 마이 러브 NK: 붉은 청춘]]에 등장하는 모스크바 8진 중 1명이었던 최국인은 조선의용군 산하에 있는 연극단에 들어가 활동했고 그는 조선의용군 김두봉과 인연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김일성을 상당히 증오하는 발언을 다큐멘터리 내내 한 것으로 유명하다. * 월북 인사이며 [[북한]] 정권 초창기에 [[숙청]]당했기 때문에 다른 북한 정치인들에 비해 존재감이 부족한 편으로 현대 한국에서는 [[김일성]]과 함께 부정적 평가가 지배적인데 북한의 지도자로서 [[6.25 전쟁]]에 동의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항일 운동 역시 [[공산주의]]자로서 참여했기에 현대 한국 정부와 법통이 이어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등 현대 한국에서 쉽게 옹호해주기 어려운 입장을 나타내기도 했다. 북한에서도 김일성과의 권력 투쟁에 패해 숙청된 인물로서 평가가 낮다. * 과거에 [[개성시|개성]]에 갔을 때 [[황진이]]의 무덤에 헌화하고 술을 부은 뒤에 절을 했다고 한다. 국문학자로서 황진이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 행동이었지만 후에 김두봉이 숙청당할 때 이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일국의 국가원수라는 자가 기생 년의 무덤에 꽃다발을 놓고 술을 따르고 절까지 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이유였다고 한다. 다만 김두봉의 숙청은 그가 [[연안파]]였기 때문이었고 황진이에 대한 문제는 구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김두봉이라는 인물이 정통 공산주의자였다기보다는 상당히 전통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아돌프 히틀러]]와 동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