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두봉 (문단 편집) === 몰락 === 전후에도 김두봉이 원한 총선이 실시되지 않고 일부 지방선거만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김두봉과 김일성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김일성의 계속되는 [[토사구팽]]과 개인숭배 강화에 환멸을 느낀 연안계와 고려인 지도자들이 1956년 3월,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의 스탈린 격하의 영향을 받아 김일성에 맞서 8월 그룹을 조직하면서 김두봉 역시 여기에 합류하였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김두봉은 주권기관 선거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면서 김일성을 비판했다. 어쨌거나 정치위원회에서 개편된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결국 1956년 8월 [[최창익]], [[윤공흠]], [[박창옥]] 등이 김일성의 독재를 비판하고 집단 지도 체제 구성을 시도한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하였다. 김두봉은 처음에는 동참했으나 소련이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고 전원회의 2주일 전에 발을 빼버렸다. 살아남기 위해 최창익, 박창옥 등을 비판하는 데 동원됐으나 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최창익, 박창옥을 비판해야 하는 당 회의 때 늙어서 힘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휴가를 가버리는 등 반대파 숙청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이 때문에 김일성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선거에서 대의원으론 재선되었으나 상임위원회 위원장 자리는 [[최용건]]에게 내주어야 했다. 이후 조직지도부 부부장 [[김영주(북한)|김영주]]가 주도한 열성자회에 끌려가 비판을 당했는데 늙고 병든 김두봉이 운신을 하지 못하자 김영주가 늙은 반동이 늙은 것이 벼슬인 줄 아냐고 못나오면 우리가 끌어내자고 군중을 선동하여 그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개처럼 끌어내서 조리돌렸다. 이듬해인 1958년 3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1차 당대표자회에서 전 부수상 [[박의완]] 등과 함께 혹독한 비판을 받고 상무위원에서 해임, 출당 조치되었다. 1958년 3월 7일, 김일성은 도, 시, 군당위원장들 및 인민위원장들에게 한 연설 <당사업을 개선할데 대하여>를 통해서 "김두봉은 자기가 대통령이니, 왕이니 하면서 거기에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일하는 기술서기들을 궁녀라고 하고 상임위원회를 당보다 더 높다고 하였으며, 별의별 못하는 소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상임위원회를 무법천지로 만들어놓았습니다."라고 그를 혹독하게 비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