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동훈(1939) (문단 편집) == 생애 == 1939년 경성에서 아버지 김인재와 어머니 최성순 사이에서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동국민학교와 경기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미학과 재학 시절인 1959년부터 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하며 연극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1960년에 허규, [[이순재]], [[이낙훈]], [[김순철(배우)|김순철]], [[오현경(1936)|오현경]] 등과 극단 '실험극장'을 결성해 이오네스코 원작의 연극 <수업(나영세 연출)>에 출연하면서 배우로 데뷔했다. 1962년 드라마센터 개관 이래 <포기와 베스>, <햄릿> 등지에서 주/조연을 맡아 점차 주목받았고, 이후 <리어왕(1964)>, <휘가로의 결혼(1968)>, <롤라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1969)> 등지에서도 맹활약했다. 1962년 KBS-TV 개국 당시 특채된 후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통해 TV 드라마에도 발을 넓혔고, 1964년 동양TV 개국 후 그쪽으로 옮겨 1971년 TBC 일일연속극 <아씨> 등지에도 숱하게 나왔고, 1973년부터 실험극장의 대표를 맡은 걸 전후해 연기보다 연출에 더 많이 전념하는 한편, 1975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에덴예식장 건물을 인수해서 실험소극장을 열어 <에쿠우스>를 시초로 장기공연 체제 및 연극의 직업화를 추구했고, [[서인석]]과 윤호진, [[송승환]], [[최민식]], [[조재현]] 등의 배우 및 연출가들을 발굴시키거나 스타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1983년부터 3년 동안 한국연극협회 회장도 같이 맡으며 지방 연극계의 발전을 위해 연극사상 최초로 '전국연극제(현 대한민국연극제)'를 창설하는 등 한국 연극계의 혁신을 꾀해 보기도 했다. 또한 1984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도 같이 맡았다. 1992년 서울시 측의 [[운현궁]] 복원 사업에 따라 운니동 소극장을 닫고 이듬해 강남구 압구정동에 새 극장을 열어 새 출발을 하고자 했지만, 경영난에 시달리는 어려움이 있었다. 다른 한편 그는 1990년 단국대학교 경영대학원 예술경영학과를 마치고 연극영화과에 출강해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데 힘을 쏟기도 했다. 1996년 3월 21일 7시, 삼성의료원에서 뇌졸중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사후 서울 청담동성당에서 [[죽은 이를 위한 미사#장례 미사|장례 미사]]를 거행한 뒤 유해는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사후 4년이 지난 2000년에는 윤대성 교수 등에 의해 그의 이름을 딴 '김동훈연극상'이 제정되어 2014년까지 장래성이 뒷받침되는 젊은 연극배우들을 발굴해서 시상해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