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동엽(1938) (문단 편집) == 심판 시절 ==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지도자로 바로 가지 못하고, [[대한야구협회]] 심판으로 활동했다. 이 당시 특기할 만한 일은 1963년[* 이 일화를 소개한 [[https://news.joins.com/article/2699081|중앙일보 1992년 4월 3일자]] 기사에는 1966년으로 되어 있지만,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63년이 맞다.[[https://ja.wikipedia.org/wiki/1963年アジア野球選手権大会|#]] 66년에는 대회가 열리지 않았다. 일본은 프로 선발이 아니라 사회인 팀을 내보냈으며(이때는 모든 야구 국제 대회는 아마추어 대회였다.), 이해에 시도대항 야구대회에서 우승한 세키스이 화학공업(積水化学工業)을 보냈다고.] 제5회 아시아야구 선수권대회에 심판으로 출장, 일본팀에 대한 극심한 편파 판정을 하여 한국팀의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대회는 한국·일본·필리핀·대만 4개국이 참가했는데, 당시 한국 야구협회는 홈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꼭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심판들에게 일본팀을 집중적으로 견제하라고 지시했고, 일본전 주심을 맡은 김동엽은 스트라이크/볼을 엉터리로 판정한 끝에 일본팀의 멘탈을 나가게 하여 한국이 우승할 수 있도록 공을 세웠다 [[카더라]]. 여기서 또 다른 에피소드로, 당시 [[한국일보]] 체육부 소속 '''오도광'''[* 1937~2012. 1958년 한국일보 공채 수습기자 1기로 언론계에 입문하여 1995년 정년퇴직 할 때 까지 스포츠 전문 기자로 활동하며 한국일보와 [[일간스포츠]]의 체육부장, 편집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고 [[대한체육회]] 이사로도 일했다. 2012년 10월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별세하였다.] 기자가 김동엽의 편파 판정에 대해 '''"치졸한 애국심"'''이라는 타이틀로 그를 호되게 비판하는 기사를 올린 적이 있었다. 당시 오 기자는 김동엽과 친한 것도, 그렇다고 서로 으르렁대던 것도 아닌 그냥 살짝 면식만 있던 정도였고 김동엽에 대한 기사를 올린 사실조차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수십년이 지난 후 오 기자의 사위가 "김동엽이란 양반이 쓴 회고록(후술할 '''그래 짤라라 짤라''')에 장인어른 얘기가 있더라"고 전하여 그 책을 읽어 보니 '''"그래도 오도광 기자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중립적인 시각으로 비판할 줄 아는 기자 정신의 소유자였다"'''라며 오 기자를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아무튼 오 기자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 호의적인 평을 들어서 기분은 흡족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