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동엽(1938) (문단 편집) == 일화 == * 생전의 김동엽은 화끈한 성격과 함께 야구계의 대표적 주당인 것도 유명했다. 한번은 '''[[음주운전|만취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무사히 도착했다는''' [[믿거나 말거나|믿을 수도 없고 믿어서도 안 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운전 중 신호위반으로 교통경찰에게 걸리자 차에서 내린 후 '''도로 한복판에서 다짜고짜 큰절을 하면서 벙 쪄있는 경찰을 뒤로 하고 차를 몰고 유유히 사라진 적'''도 있다. 그리고 또 걸리자 차에서 내리더니 '''아무 말 없이 자기 차를 부수기 시작, 문짝 하나가 걸레가 될 지경'''이 되자 황당해 하던 경찰들이 "감독님 참으세요"라고 말렸대나 뭐래나. * 50대 중반에 길거리에서 일반인들에게 행패를 부리던 [[부사관]]급 군인 두명을 간단히 제압한 뒤 두 사람의 요대를 붙잡고 도망 못가게 한 다음 '''"여러분! 문민시대에 이런 군인들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하면서 확실하게 혼을 내준 훈훈한 일화도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군인은 계급을 막론하고 민간인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군 [[군사경찰|헌병대]]에 신고되면 대단히 골치아프다. 그래서 되도록 민간인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고성을 지르거나 보기 민망한 행동을 하여 민폐를 일으키는 일이 종종 생기게 된다. 병사일 경우 부대 복귀 후 바로 [[군기교육대]]에 입소할 수 있고 심할 경우 [[영창|피아노를 열심히 치거나]] 구속될 수도 있다. [[부사관]]의 경우는 근신이나 감봉 등의 [[징계]]를 받을 수 있으며, 징계 여부를 떠나 부사관 사이에는 선임과 후임간의 군기가 엄해서 당시 [[BEQ]](부사관 독신자 간부 숙소)에서는 [[구타]]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시절이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 민간인과 시비가 붙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 심판으로 활동하던 [[1969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 때 황당한 [[오심 및 편파판정|오심]]을 저지른 적이 있다.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와 맞붙은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선린상고]]의 타자가 주자를 3루에 두고 짧은 내야땅볼을 쳤는데 3루 주자가 홈으로 달려들자 주심이던 김동엽은 상황을 제대로 보려고 마스크를 벗으려 했지만, 하필 마스크가 코에 걸려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결정적인 장면을 놓치고 말았다. 간신히 마스크를 벗은 김동엽은 그 짧은 타구에 3루 주자가 사는 일은 드물다고 지레짐작 하여 요란하게 아웃 선언을 했는데, 선린상고 응원단이 들고 일어나서 야유를 퍼붓자 김동엽은 그제서야 판정을 잘못 내린걸 알고 아차 싶었다. 게다가 선린상고 감독 박진원이 그라운드로 뛰어나와 "[[삼척동자]]도 웃겠다 이자식아! 그게 아웃이라고?!" 라며 길길이 날뛰면서 항의했지만, 김동엽은 그렇다고 판정을 번복하자니 야구 선배인 [[서영무]] 경북고 감독도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냥 친구인 박 감독을 물고 늘어지기로 했다. 김동엽은 "심판이 아웃이라면 아웃 아니냐?" 라며 [[철면피|얼굴에 철판을 깐 채]] 자신의 ~~오심~~ 판정을 고수하면서 급기야 뚜껑이 열린 박 감독이 선수들을 [[덕아웃]]으로 철수시켜 버렸지만 김동엽은 "이봐 아가리(박진원의 별명), 선수들 내보내지 않으면 [[몰수 게임]] 처리할테니 그리 알라우" 라며 오히려 [[최후통첩]](?)을 보냈고, 결국 박 감독은 마지못해 선수단 철수를 풀면서 시합은 재개되었다. 이후 박 감독은 경기 내내 김동엽의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로 [[도끼눈]]으로 째려보았다고(...). 그나마 이날 선린상고가 12대 5로 경북고를 물리치고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하면서 김동엽의 오심 소동은 유야무야 되었고, 나중에 김동엽은 박진원과 술 한잔 하면서 그 때 자신이 실수한 거라며 사과했다고 한다(...). * [[건국대학교]] 감독 시절 친분이 깊던 원로 야구인 풍규명의 주선으로, 그의 사위이자 당시 고교야구 최고의 1번 타자로 각광받던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선린상고]]의 [[이해창(1953)|이해창]]을 영입하게 되었다.[* 고교야구 선수가 어떻게 원로 야구인의 사위인지 궁금하신 분들이 있을텐데 내막은 이렇다. 루키 스타였던 이해창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 야구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야구는 [[돈|후원]]이 없으면 하기 힘들기 때문. 그런 그의 실력과 잠재력을 알아본 풍규명 씨가 그를 거둬 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줘서 이해창은 다시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한편 풍규명 씨에게는 풍옥희 라는 딸이 있었는데 집에서 숙식하며 야구를 하던 이해창은 어릴 때부터 친누나 처럼 지내던 풍옥희와 '''눈이 맞아버렸고''' 이해창은 풍규명의 딸을 '''임신시키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풍규명은 극대노하며 죽일지 살릴지 고민하였으나 결국 아들처럼 키워온 이해창을 죽일 수는 없으니(...) 그대로 사위로 삼았다. 이해창은 이후에도 아내와 백년해로 중이다. 여담으로 아내분이 2살 연상인 [[연상연하]]커플이다.] 그런데 이해창이 고등학교 선배들의 강권에 못이겨 [[중앙대학교]]로 진로를 선회했다는 소식을 접한 김동엽은 단박에 중앙대로 쳐들어가 선배인 [[김진영(1935)|김진영]] 감독에게 '''"우리 선수 건들면 선배고 뭐고 없다. 이해창 당장 내놓으라"'''며 대놓고 한바탕 [[깽판]]을 쳤다.[* 이건 그나마 순화된 표현이고 실제로는 김진영 앞에서 니가 선배냐면서 온갖 [[육두문자]]를 시전했다.] 그 기세에 질린 김진영은 김동엽에게 사과하며 이해창 영입을 철회했고 그렇게 이해창은 건국대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롯데]] 감독이던 1977년, 실업연맹전 결승에서 라이벌 [[한국화장품 야구단|한국화장품]]을 꺾고 우승했을 때 김동엽이 구단의 [[높으신 분]]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높으신 분이 김동엽에게 우승축하 인사를 건네며 그 공을 치하하자 김동엽은 그 자리에서 당당하게 우승보너스 지급을 요구했다. 정확한 액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로선 상당한 금액으로 추정되는데, 높으신 분이 "그 돈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 우리 회사 여공들이 밤 새워 [[껌]]을 만들어 팔아야 벌 수 있는 돈이다"[* 껌은 생산 공정이 자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여공을 데리고 만드는 것이 아니긴 한데 라인 중간중간엔 사람이 서 있어야 하고 시대상을 생각하면 아마 이 사람들을 여공이라고 칭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제과업계인 [[해태 타이거즈]]도 우승 보너스를 요구하는 선수들에게 이런식으로 윽박질렀다고 한다.]라고 난색을 표시했다. 이에 다혈질인 김동엽은 걸직한 [[황해도 방언]]으로 '''"제에미! 기럼 여공들 데꾸와서 야구 하시라우요!!!"'''라고 버럭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김동엽이 그날 이후 어떻게 되었을 지는 [[안 봐도 비디오|안 봐도 뻔할 것]]이다. 그렇다. '''모가지''' 당했다. * [[성균관대학교]] 감독으로 재임하던 1978년 대통령기 대학야구 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연세대학교]]와 맞붙었는데, 상대 선발 [[최동원]]은 전날 [[동아대학교]]와의 준결승에서 [[임호균]]과 대결하여 연장 14회까지 0대 0으로 맞서다가 일몰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중단되었고 다음 날 속개된 경기에서 18회까지 또 던지며 [[김봉연]]의 끝내기 홈런으로 같이 18이닝을 던진 임호균을 꺾고 간신히 승리한 상태였다. 그러고도 바로 이어진 성균관대와의 결승전 또한 9이닝을 완투하며 이틀 동안 무려 27이닝에 투구수 375개, 12피안타, 33탈삼진에 겨우 2실점에 그치는 경악스러운 맹투로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적장이던 김동엽은 그날 패배했음에도 경기가 끝난 후 마운드로 올라가 최동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동원아, 너 오늘 정말 잘 던졌다. 대단하다"'''며 격려했다. 이 날만큼은 쇼맨십이 아닌 투혼을 발휘한 야구 후배에 대해 정중하게 경의를 표한 것이다. * 해설가로 활동 중이던 어느 날,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김동엽이 이런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이보라우, 앞으로 나한테 해설자(解說者)가 아니라 해설가(解說家)라고 해야 돼. 해설 못하는 놈들은 해설자고 해설을 잘 하는 사람은 해설가라고 하는거야"''' 그래놓고 조금 쑥쓰러웠던지 다시 이런 [[드립]]을 덧붙였다. '''"당신(기자)들도 구분을 해야 돼. 기사 못 쓰는 사람이 기자(記者)고, 기사를 아주 잘 쓰면 기가(記家) 라고 불러야지"''' 이 얘기를 들은 기자들은 그저 피식피식 웃을 뿐이었다. * MBC 감독 시절, 김동엽 자신이 직접 저지른 해프닝은 아니지만 코미디 같은 일화에 엮인 적도 있다. 1985년 8월 20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잠실경기 때 2대 2로 맞선 8회말 1사 후에 [[김재박]]이 괴물신인이라 불리던 [[선동열]]을 두들겨 3루타로 출루하며 만든 찬스에서 [[송영운]][* [[마구마구]]에서는 본명이 아닌 ‘송지운’이라는 가명의 선수카드가 있다.]이 타석에 들어섰다. 그런데 선동열이 타자 앞에 공을 패대기치며 포수 뒷쪽으로 빠지는 폭투를 저질렀고 3루에 있던 김재박은 얼씨구나 하고 홈으로 뛰어들었는데, 타자인 송영운이 발목을 부여잡고 뒹굴며 주심에게 [[몸에 맞는 공|몸에 맞았다고]] 부득부득 우기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한 주심은 하는 수 없이 송영운에게 출루를 지시했고, 기껏 홈을 밟은 김재박은 3루로 복귀... 당연하게도 폭투 또는 패스트볼이면 인플레이 상황으로 3루 주자의 득점이 인정되지만, 타자가 공에 맞았다면 볼데드 상황이 되므로 주자가 홈을 백번 밟아봤자 득점은 될 리 없다. 결국 그날 경기는 11회 연장 끝에 2대 2 무승부로 종료되었다. 사단은 경기 후 선수단이 단골로 이용하던 강남의 [[사우나]]에서 터졌는데,[* 당시 야구장엔 라커룸 시설이 미비해서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은 야구장 근처의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송영운]]이 목욕탕에서 동료와 샤워를 하면서 '''"아까 그거 안맞은건데 쇼한거임. 나 연기 좀 짱인듯?"'''이라고 실토하며 키득대던 중, 밖에서 얘기를 들은 김동엽이 벌컥 목욕탕으로 뛰어들어 와서는 '''"이 멍청한 놈, 그걸 자랑이라고 하냐!"'''라고 노발대발 하며 송영운을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팼다고 한다. 그런데 고 [[이종남(기자)|이종남]] 기자의 저서 '''사람 좋으면 꼴찌'''에 기재된 내용은 좀 다르다. 당시 사구로 1루에 출루한 송영운이 1루 코치로 나와있던 김동엽에게 '''"감독님 저 사실은 안맞았어요 히히히"'''라고 귀띔하자 김동엽은 순간 '''혀를 콱 깨물고 싶은 심정'''이 되었고, 경기 종료 후 사우나에서 김동엽이 송영운을 불러 말하기를, >김동엽: 이보라우, 타자가 투구에 맞으면 볼데드야 인플레이야? >송영운: 볼데드죠. >김동엽: 기럼 투구가 뒤로 빠지면? >송영운: 당연히 인플레이죠. >김동엽: 알긴 아는구만! 기러믄 말이네, 아까 (3루 주자)[[김재박]]이 들어올 수 있간 없간? >송영운 : …??? 김동엽의 핀잔에 고개를 갸우뚱 하던 송영운은 30분 후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던 중 '''"아하, 그랬구나!!"'''라며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 차렸대나 뭐래나. 아무튼 이후 송영운의 출장 기회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1988년 시즌을 끝으로 송영운은 유니폼을 벗고 말았다(...). [[파일:김성근vs김동엽.jpg|width=70%]] *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말빨과 독한 성격 등 공통분모가 많아서인지 [[김성근]]과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 다만 얼굴만 마주치면 서로 못잡아먹어 안달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만담]] 수준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김성근이 [[츳코미]] 포지션? 둘의 만담은 1985~87년 시즌 중반까지 서울 라이벌인 [[OB 베어스|OB]]와 [[MBC 청룡|MBC]] 감독으로 맞서면서 한층 더 독해졌는데 1987년 5월경 전기리그 막판 상대와의 경기를 앞두고 [[잠실야구장]] 구내식당에서 이런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식당에서 점심으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던 김동엽 자리에 [[김성근]]이 합석하였다. > >김성근: 이기지도 못하면서 비싼 것만 드시누만. >김동엽: 그러지 말라우야. 잘 먹어야 이길거 아니가서? >김성근: 고기 먹어봤자 소화도 안될텐데 뭐? >김동엽: 닥치라우, 우린 오늘부터 10연승이야. >김성근: 10연승 좋아하시네. 오늘 내일 우리한테 다 지면 어쩌시려고? >김동엽: 그러면 8연승이지. >김성근: [[뭔 개소리야|8연승 같은 소리하지 마쇼.]] [[모가지#s-1.1]]에요 모가지! >김동엽: 모가지좀 또 떨어지면 어때. 내레 땅에 떨어진 모가지 주워서 붙이는데 선수잖네. (옆에서 밥먹고 있던 [[강병철]]을 가리키며) [[강병철|얘]]는 모가지 떨어져 본 적이 없어서리 서툴겠지만 나야 뭐 수도 없이 붙여보지 않았어? 모래가 묻으면 좀 따끔따끔 하겠지만... >김성근: 그러다 모가지가 거꾸로 붙으면 어쩌려고 그러슈? >김동엽: 더 좋지. 뒤까지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김성근: 좋기도 하겠수. 그럼 MBC가 아니고 CBM 이유. > 이 대화가 있은 지 두 달 만에 김동엽은 실제로 '''모가지'''가 달아났고, 다시는 현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김성근]]은 2017년 5월 23일 [[한화 이글스]] 감독에서 사퇴하고, 2022년 시즌을 끝으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코치 어드바이저를 그만둘 때 까지 그라운드에 남아 있었다.[* 김성근이 김동엽 사후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등번호 38을 달았다는 말이 있으나 프로 원년 코치 시절부터 38번이었다. 정확히는 김동엽과 친해서 둘 다 번호를 38번으로 달았고, 김동엽이 사망한 이후에는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번호를 38번에서 바꾸지 않았다는 이야기. [[등번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보통 38번은 선수들이 다는 번호고 코칭스태프나 감독은 7~90번대를 다는 것이 일반적이라 감독의 번호로 일반적인 번호는 아니다.] ~~그리고 [[최강야구]] 감독으로 취임했다...~~ 참고로 저 대화에서 얘라고 불린 [[강병철]] 감독은 당시 현장을 떠나 야인으로 지내던 중이었다.[* 강병철은 1986년 시즌을 마치고 이른바 '''까자값 사건'''(상세 내용은 [[강병철]] 항목 참조)으로 [[롯데 자이언츠]] 감독 재계약에 실패한 후, [[1988년]] [[빙그레 이글스]]의 코치로 입단하기 전까지 야인으로 지내며 [[스포츠서울]] 객원기자 등으로 활동했다. 김동엽의 말대로 강병철은 롯데 감독에서 물러나기 전까지는 '''잘려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1978년 [[동아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1983년 [[롯데 자이언츠]] 타격 코치로 영입되어 이듬해 감독으로 승격될 때까지 자신의 의지 또는 다른 팀의 회유에 의해 자리를 옮긴 적은 있지만 강제로 잘려서 백수가 된 적은 없다는 의미다.] * 1986년 전기리그를 5위로 마치고 후기리그에 올인하게 된 김동엽은 선수단을 모아놓고 일장훈시를 하며 "이기는 야구는 내가 알고 있으니 너희들은 맡은 임무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분위기를 추스르고자 했는데, 이 당시 기자들에게 '''물야구론'''이란 어록을 남겼다. '''"MBC는 앞으로 물야구를 하겠다. 물이란 약한 듯 보이지만 실은 굉장히 강하다. 조그마한 틈이라도 있으면 파고들어 큰 바위를 부수지 않는가"''' 듣기에는 굉장히 그럴 듯 했지만 MBC는 그해 후기리그에서도 3위에 머무르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 김동엽의 물야구는 말 그대로 물먹었다. * 1986년 시즌 종료 후 MBC는 김동엽의 감독 재신임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시즌 중 코치 구타사건으로 구설수를 일으키고 헬스클럽에서 역기를 들고 운동을 하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 그래서 김동엽은 부상기간 동안 목발을 짚고 그라운드로 절뚝대며 나와 심판에게 목발을 들이대며 항의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였다. 역시 쇼맨십의 달인이다.]을 입은 것을 자기관리 소홀로 간주하여 김동엽의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친 상태였는데, 때마침 삼성 감독이던 [[김영덕]]이 계약 만료가 되자 김영덕을 영입하기 위한 물밑작업에 들어갔고 김영덕도 서울팀 감독직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지라 김영덕의 영입, 동시의 김동엽의 불신임은 거의 기정사실로 보였다. 그런데 김영덕이 모 언론지 [[기자]]를 다리삼아 MBC 감독자리를 노린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 소식을 들은 MBC 구단의 [[높으신 분들|높으신 분]]이 "기자한테 기대서 감독으로 오려는 사람은 필요없다"며 김영덕에 대한 영입의사를 철회, 대안을 상실한 MBC는 결국 김동엽의 감독직을 유지 시키기로 했다. * 이 과정에서의 일화로, 김동엽의 재신임 결정 당일 구단 사무실을 찾아온 김동엽에게 프런트 직원이 장난으로 "참 안되셨습니다"라고 위로하는 시늉을 하자, 김동엽은 고개를 떨구며 "내 그럴줄 알았다"라고 체념하는 모습을 보였고, 더 이상 놀렸다간 곤란할것 같아서 직원은 태도를 바꿔 "농담이었고요, 사실 방금전에 스테이(stay, 유임)로 결정났습니다"라고 실토하자 김동엽은 잠시 눈물을 비추는 듯 하더니 표정을 바꾸어 '''"이번에 잘리면 열 세번째 모가지다. 하도 많이 잘려서 아무렇지도 않았어"'''라고 얼버무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MBC 프런트 직원과 점심을 같이 하는 자리에서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하자 김동엽은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MBC가 나와 재계약 한것은 MBC를 1류 구단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1류 감독답게 MBC를 강팀으로 만들 것이다"'''라면서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태도를 회복한 상태였다. 그러나 간신히 허락받은 감독직은 위의 [[김성근]]과의 에피소드와 같이 중도해임으로 마무리 되었으니… * 김동엽은 평소 술자리에서 [[레몬]] 꼭지를 따서 주물러 짜낸 레몬즙을 맥주잔의 3분의 1쯤 채우고 나머지 3분의 2에 [[소주]]를 부어 섞어 만든 레몬소주를 즐겨 마셨는데, 멋모르고 같이 쭉쭉 들이키다 [[요단강 익스프레스]] 탑승 직전까지 간 이들도 수두룩하다. 대표적인 희생자가 연예계의 주당으로 꼽히던 탤런트 '''[[한진희]]'''. 방송을 마치고 여의도의 단골 일식집에서 한잔 기울이던 김동엽과 우연히 합석했다가 멋도 모르고 김동엽에게 술내기를 제의했는데, 김동엽은 "나는 술이 약하니 레몬소주로 하겠다"라고 한발 빼는 척을 했고 이에 낚인 한진희는 김동엽이 만들어준 레몬소주를 받아 마시고 "이게 술이냐 주스냐"라고 비아냥 댔지만, 결과는 한진희의 실신 TKO패. 이후 며칠간 입원까지 하며 후유증으로 죽어난 [[한진희]]는 주변 사람들에게 '''"김동엽 저 괴물같은 인간이 주는 레몬소주는 절대 마시지 말라"'''라고 신신당부 하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고 한다. * [[해태 타이거즈]] 전성시절 타팀들에게 공포의 아이콘이었던 빨간색 상의에 검정색 하의 스타일 원정 유니폼(속칭 '''검빨''' 유니폼)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이 아이디어는 주당 김동엽답게 술병 라벨에서 따온건데, 팀 창단을 앞두고 유니폼 디자인을 본 김동엽은 "홈경기 유니폼은 괜찮은데 원정 유니폼이 영 아니다"라고 투덜대던 중 평소 즐겨 마시던 '''[[http://blog.daum.net/kkyeongho/15859639|런던 드라이진]]''' 라벨에 그려져 있는 영국 근위병의 제복을 보고 "이거다!" 하고 무릎을 쳤고, 이렇게 탄생한 해태의 원정 유니폼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정작 선수들은 햇빛과 열기를 고스란히 저장하는 유니폼 때문에 한여름 내내 죽을 맛이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그 유니폼은 2001년 시즌 도중 해태가 [[KIA 타이거즈]]로 넘어가며 팬들의 추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2011년 7월 26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광주경기 에서 올드 유니폼 이벤트로 다시 부활하며 올드팬들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 김동엽이 생전에 농반 진반으로 말하길 '''"내가 죽거든 딴 것은 다 필요 없다. 관 속에 [[화투]]와 카드 한 모씩만 넣어달라."''' 술과 함께 도박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오죽하면 부친상을 당했을때 '''상주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빈소는 안지키고]] 화투판을 들락거렸다 하니'''… * 김동엽은 항상 깔끔한 스포츠형 머리를 고수하고 다녔다. 방송 출연 시 그 이유를 묻자 시원하고 깨끗해서 그런 스타일을 유지한다고 답했다. 그래서 그의 머리를 만져주는 단골 이발소가 정해져 있었다고. 김성근과 김동엽의 머리스타일이 같은 이유도 그 단골 이발소가 같았기 때문이라 한다. * 김동엽이 [[MBC 청룡]] 감독으로 재직 중이던 1986년에 신인으로 입단한 [[성균관대학교|성균관대]] 후배 [[김태원(야구선수)|김태원]]을 가리키며 '''"우리 팀에 [[선동열]]과 맞먹는 신인이 들어왔다"'''며 그 해 우승을 장담했다. 하지만 김태원은 MBC에 입단한 이후 경험 부족과 마운드에만 올라가면 벌벌 떠는 새가슴 때문에 김동엽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고, 김동엽 체제 아래서 계속 기회를 부여 받았지만 죽만 쑤었다.[* 1986년 시즌에 107이닝을 던졌지만 2승 6패의 부진한 성적만 남겼다.] 김동엽이 MBC에서 퇴단한 후에도 김태원은 계속 부진의 늪을 헤메다가 입단 4년 뒤인 1990년, MBC의 구단 매각으로 간판을 바꾸어 단 [[LG 트윈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그 해 드디어 포텐이 터지면서 18승을 거두었고, LG의 초대 감독 [[백인천]][* 물론 [[MBC 청룡]]의 초대 감독이기도 하다...]은 김태원의 맹활약에 힘입어 LG의 창단 첫해 우승이자 자신의 감독 커리어 유일한 우승을 거둘 수 있었다. 김동엽의 예언은 4년 지난 뒤에야 이루어진 셈이지만, 만약 김태원이 김동엽 시절에 조금 일찍 각성했더라면 김동엽도 좀 더 오래 MBC의 감독으로 남아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 1985년 [[MBC 청룡]]에 입단한 [[재일교포]] 내야수 [[유고웅]][* [[일본프로야구]] 시절 [[주니치 드래곤즈]] 에서 뛰었고 1985~1988년까지 MBC 소속으로 플레이 했다.]이 김동엽을 특히 무서워했다고 한다. 사실 빠따질과 구타의 원조는 일본인데도, 김동엽식의 스파르타 식 지도법은 일본 출신 유고웅조차 견디기 힘들었던 듯.[* 다만 유고웅이 주니치 시절에 모셨던 [[요나미네 카나메]], [[곤도 사다오]] 감독은 동시대 일본야구 감독들과 달리 선수들에게 체벌과 작전 지시를 최소화한, 메이저리그식 코칭 스타일을 선호하는 감독이었다.] * 1987년 5월 10일자에 [[손석희]]가 진행하는 [[MBC 뉴스데스크]]의 한 코너에서 당시 신인 유격수로서 대단한 활약을 하던 [[류중일]]과 이미 대스타였던 [[김재박]]을 비교하는 보도를 했다. 이 코너에서 당시 [[박영길]] 삼성 감독은 류중일을 더 나은 유격수로 꼽은 반면, 당시 청룡 감독이던 김동엽은 "지금 당장 비교하라면 역시 어린애하고 어른하고의 비교가 되기 때문에 비교를 안하려 합니다."고 말했다.[[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804002_19322.html|#]] 평가를 유보하는 신중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자기팀인 김재박을 어른으로 비교하면서 간접적으로 높여준 것. 이후 김재박, 류중일이 김동엽의 후배 감독으로 청룡의 후신인 LG 트윈스 감독을 맡은 것을 보면 참으로 묘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셋의 행보도 비슷했는데, MBC-LG 감독이 되기 전에는 리그를 대표하는 명장이었지만 MBC-LG에서는 영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업 감독으로서는 날았던 김동엽이 청룡에서 흑역사를 썼고, 김재박도 [[현대 유니콘스]]에서는 명감독이었지만 LG에서는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DTD]]를 막지 못했다. 류중일도 삼성 감독의 영광을 LG에서는 보여주지 못했다. 물론 류중일은 LG를 2년 연속으로 가을야구로 인도하긴 했으니 앞에 둘보다야 낫지만 그래도 구단의 기대치를 충족하지는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