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동기(야구)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인천고 시절 형인 [[김상기(야구)|김상기]]와 함께 형제 투, 포수로 유명했다. [* 형인 김상기는 우투우타 포수인 동생과 달리 좌투좌타 투수였다. 인하대를 졸업한 후 삼미에 입단했지만 큰 인상을 보여주지 못한 채 87년 시즌이 끝나고 방출되었다. 동생과는 86~87시즌 청보에서 같이 뛴 경력이 있다.] 고교시절부터 대학 4학년까지 내내 [[김상국]](빙그레 입단)과 함께 청소년대표, 국가대표 포수를 지냈다. [[인하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고향팀 [[청보 핀토스]]에 지명된 후 팀의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입단 당시에는 국가대표 출신의 고교 선배 [[김진우(1958)|김진우]]가 주전 포수로 활약했지만 화려했던 아마 시절에 비해 기력이 갈수록 퇴보했고 김진우의 백업이던 [[금광옥]]은 평범한 실력을 보여주는데 그쳤다. 결국 김동기에게 기회가 더 주어지게 됐다. 무엇보다 그는 투수진에 비해 타선이 허약했던 [[태평양 돌핀스]]에서 [[윤덕규]], [[김경기]]와 더불어 타선을 이끌었다. 특히 1990년대 초중반 4번타자 김경기-5번타자 김동기 타순은 "KK포"라고 불리며 팀의 물방방이 타선에서 그나마 제몫을 해주었다. 또한 이 당시 포수는 방망이가 약한 선수들이 많았지만, 김동기는 연간 10개 이상의 홈런을 뽑아냈기 때문에 80년대 후반-90년대 초중반 공격형 포수로써 명성을 떨쳤다.[* 이만수 역시 두자릿수 홈런을 뽑아냈다.] 특히 [[선동열]]에게 강했는데 선동열에게 만루홈런 두 개를 쳤다. [[1988년]] 전기리그 종료 시점 때 타율이 0.379였고 후기리그 초반까지도 0.358의 타율에 10홈런으로 가공할 만한 타격감을 선보였으나 8월 12일 [[MBC 청룡]]과의 [[숭의야구장|인천]] 홈 경기에서 기습번트를 하고 1루로 뛰다가 발목을 접질려 인대가 파열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전력에서 이탈했다. 그해 타격왕은 MBC 청룡의 [[김상훈(1960)|김상훈]]이 0.354의 타율로 차지한다. 타율이 앞서 서술했듯이 부상으로 잔여 시즌에 결장하여 규정타석에 미치지 못함으로 타격왕을 아깝게도 놓칠 수밖에 없었다.[* 규정타석만 채웠으면 이만수에 이어 포수 두번째 타격왕이 될수 있었다. 포수 두번째 타격왕은 양의지가 되었다.] 다음 해인 [[1989년]] '''[[KBO 리그]] 최초로 한 시즌 전경기 선발 출전 포수'''로 등극하며[* 야구팬이면 잘 알겠지만 엄청나게 힘든 기록이다. 포수라는 포지션은 경기내내 쭈그리고 앉아있어야 되고 투수의 140~150km 시속 패스트볼을 받아내야 되는 포지션이라서 다른 선수들에 비해 피로도가 굉장히 높은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이것때문에라도 아무리 안티 야구팬이라도 투수와 포수만은 레져로 안보기도 한다. 이 기록은 2006년 [[강민호]], 2015년 [[김태군]]이 계승했다.] 태평양의 돌풍을 이끌었다. 특히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는 연장 14회 끝내기 결승 3점 홈런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이 경기는 인천 연고팀의 사상 첫 포스트시즌 승리 기록이며 선발로 나선 [[박정현(투수)|박정현]]이 무려 14이닝 완투승을 거둔 경기이기도 했다. 1993시즌에는 올스타전에 서군 소속으로 출전하였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KBO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 선동열을 상대로 만루홈런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1994년]]에는 [[태평양 돌핀스|팀]]이 다시금 상승세를 거두어 2위를 차지하였고, 선수 본인도 0.264의 타율에 15홈런을 쳐서 [* 홈에서는 .337 원정.190] 23개의 홈런을 쳤던 김경기, 3할타자 윤덕규와 클린업트리오를 이루며 좋은 성적 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LG 트윈스]]와의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1승도 못 하고 네 경기를 내리 내주는 바람에 아쉽게도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었다. ~~콩라인~~ 특히 통한의 끝내기 홈런으로 내줬던 1차전에서는 8회초 1사 만루에서의 병살타가 뼈아팠다.[* 만약 찬스를 살렸으면 시리즈 향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 해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투표에서 [[김동수(야구)|김동수]]에게 2표 차이로 뒤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지 못한다. 1988년때도 그랬지만 여러모로 상복이 없는 선수 시절이었다(...).[* 94년 포수 부문과 1루수 부문은 한국시리즈 우승 프리미엄이 적용된 대표적인 케이스. 김동기 VS 김동수, 김경기 VS 서용빈. [[김경기]] 문서 참조. 94년도 규정타석은 태평양 김동기, 한화 김상국 2명만이 채웠으며 김동수 선수의 경우 규정타석 미달 (22타석 부족) 이었음에도 우승팀 프리미엄 영향이 크다 볼 수 있다. 다만 세이버매트릭스를 보면 김동수가 김동기를 모두 앞서긴 하지만 규정타석 미달이 무의미. ] [[1996년]] [[5월 31일]] 포수로는 두 번째로[* 역대 19번째. 포수 최초는 [[이만수]]였다.] 1천 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그러나 백업포수가 없었던[* 물론 백업포수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당시 [[장광호]]가 김동기의 백업포수였다. 장광호는 수비 측면에서 상당한 합격점을 받는 선수였으나 타격 면에서 김동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약했다. [[이재주]]도 이 당시 태평양-현대 소속의 포수였으나 이쪽은 수비가 부실한 탓에 1군에 중용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6년 시즌 직전 [[한화 이글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김상국]]을 영입했지만 포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이 문제는 1998년 시즌 전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박경완]]'''을 사오고 나서야 해결된다.] 팀 사정으로 과부하가 걸렸고 고질적인 허리디스크로 오른다리가 마비되어 [[1996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타선이 빈약했던 팀에서 고군분투한 탓에[* 타선에 어느 정도 곧잘 치는 선수 몇 명이 더 있었다면 의존도가 덜 했겠지만, 태평양 시절에는 김경기와 김동기, 윤덕규 정도 외에는 믿을 만한 타자가 없었다. 때문에 그는 수비뿐만 아니라 타석에서 막중한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선수생활이 길지 않았고,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경쟁자들에 밀려 골든글러브는 한번도 못 받았으며[* 세이버기록으로는 부동의 1위였으나 당시는 전통적인 스탯과 우승프리미엄이 크게 작용하던 시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 [[현대 유니콘스|소속 구단이 대기업에 인수되어]] 팀 전력이 상승하려는 시점에 은퇴해서 인천의 오랜 야구팬들에게만 기억되고 있다. 그럼에도 기록을 보면 [[이만수]]의 시대가 가고 [[박경완]]의 시대가 오기까지의 사이에 [[김동수(야구)|김동수]], [[장채근]]과 함께 당대의 정상급 포수로서 당당히 경쟁했던 선수였음을 알 수 있다.[* 해태의 장채근과 활동시기가 정확히 겹친다. 1986~1995년. 1996년은 김동기도 부상으로 거의 출장을 못해서 장채근과 김동기의 활동시기는 100% 겹친다고 보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