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도연(1894) (문단 편집) == 생애 == 1894년 6월 16일 경기도 양천현 남산면 염창리(현 서울특별시 강서구 염창동)에서 아버지 김종원과 어머니 [[초계 정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성중학교(서울)|보성중학교]]를 수료하고 1913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영어·일본어 등을 공부했다. 1914년 긴조(錦城)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하였고, 1919년 [[게이오기주쿠대학]] 대학부 이재학과(理財學科)에 입학했다. 같은 해 대학 재학 중에 최팔용·[[백관수]] 등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8 독립 선언]]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9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도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출옥하였고, 1921년 [[흥사단]]에 가입하였다. 1922년 학업과 항일운동을 위해 미국으로 유학, [[웨슬리언 대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대학 졸업 후 [[컬럼비아 대학교]] 경제학 석사 과정을 졸업하였고, 이어 [[워싱턴 D.C.]]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1931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이는 한국인 최초의 경제학 박사 학위다. 1932년 귀국하여 [[연세대학교|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역임하다가, 1934년 [[김양수(1896)|김양수]] 등과 함께 조선흥업주식회사(朝鮮興業株式會社)[*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42년판)》에 의하면, 당시 자본금 150,000원으로 경성부 관훈정 143번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토지 건물 경영 및 그 청부업, 해륙물산의 무역 및 그 위탁 판매를 목적으로 창립된 회사였다. 하지만, 이는 명목상의 신고내용이었으며 실제로는 회사 내부에서 [[조선어학회]] 활동이 이뤄졌음이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밝혀졌었다.[[http://db.history.go.kr/id/hdsr_009_0030_0010_0010|#]]의 주석 86번 참고.][* 1942년 9월 당시 대표이사 사장은 김도연, 이사에 [[신현모]]·[[김양수(1896)|김양수]]·[[서민호]]·박창서(朴彰緖), 감사에 [[최순주]]·[[이인]]·김광수(金光洙) 등이 있었다. 1941년 11월에는 감사에 [[이인]] 대신 설원식(薛元植)이 취임해 있었다.[[http://db.history.go.kr/id/hs_001_1941_11_14_8680|#]]]를 창립하여 1942년 말까지 사장으로 취임[[http://db.history.go.kr/id/hs_001_1942_09_14_21620|#]]하는 한편, 1937년부터 1942년까지 명치(明治)택시합자회사 중역[[http://db.history.go.kr/id/hs_001_1937_04_05_0830|#]][[http://db.history.go.kr/id/hs_001_1942_09_05_1750|#2]], 1937년부터 1939년까지 김양수·김종철과 함께 조선제사주식회사(朝鮮製絲株式會社) 감사로 취임했으며[[http://db.history.go.kr/id/hs_001_1937_04_07_1760|#]][[http://db.history.go.kr/id/hs_001_1939_03_07_1660|#2]], 1941년에 김양수와 함께 합동산업주식회사(合同産業株式會社) 이사에 취임했고[[http://db.history.go.kr/id/hs_001_1941_11_13_1090|#]], 1941년부터 1942년까지는 [[서민호]]가 사장으로 있던 남선무역주식회사(南鮮貿易株式會社)에 감사로 취임하는[[http://db.history.go.kr/id/hs_001_1941_11_14_0220|#]][[http://db.history.go.kr/id/hs_001_1942_09_14_27170|#2]] 등 여러 회사 경영에 참여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 이듬해 3월 [[서민호]]·[[신현모]]·김종철[* 1937년부터 1939년까지 김도연·김양수와 함께 조선제사주식회사 감사로 취임했던 사람이다. 체포된 이후 공판에 회부되지는 않았다.] 등과 함께 체포되었고[[http://db.history.go.kr/id/hdsr_009_0030_0010_0010|#]],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1944년까지 함흥형무소에서 2년여간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 [[장덕수]]와 함께 [[한국민주당]] 건설에 주력하며 [[미군정]]의 정책에 참여하였으며, 1946년 남조선 민주의원 의원과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에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 선거]] 때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6월 2일 제1회 3차 본회의 당시 [[윤치영]],[[장면]],[[이훈구(1896)|이훈구]],[[장기영]]과 함께 교제위원으로 뽑혔다. 같은 해 8월부터 1950년까지 [[이승만]]에게 초대 [[기획재정부|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낙선[* 무소속 [[김용우(1912)|김용우]] 후보가 15,649(50.19%) 득표하였다.]하였지만, 1954년 제3대, 1958년 제4대,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민의원. [[민주국민당]]-[[민주당(1955년)|민주당]])에 당선되었다. 민주당 내에서는 [[윤보선]] 등과 함께 구파의 일원이었다. 4.19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민주당이 집권할 당시, 같은 구파였던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처음 국무총리로 지명받았지만, 과반수를 넘기지 못해 인준받지 못했다.[* 내각제인 제2공화국 헌법에 따라 국무총리가 될 경우, 실질적인 정부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김도연의 국무총리 인준 부결은 구파가 명목 권력(대통령), 실질 권력(총리) 모두를 독식하려는 것에 반발한 신파의 거부에 따른 결과였다.] 그 대신 국무총리가 된 주인공이 바로 신파의 지도자격인 [[장면]]. 이후 장면의 1차 내각이 신파 일색으로 임명되자 반발하여 다수의 구파 의원들과 함께 탈당, [[신민당(1960년)|신민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이듬해 [[5.16 군사정변]]으로 정치활동 중단.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군소정당인 [[자유민주당(1963년)|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전국구 의원이 되었다. 1965년 5월 [[자유민주당(1963년)|자유민주당]]과 [[민정당]]이 합당, [[민중당(1965년)|민중당]]이 탄생하게 되자 민중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 해 8월 [[한일기본조약]] 비준에 반대해 [[김재광]] 등과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1967년)|신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1967년 7월 19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1991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