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도균 (문단 편집) == 연주력 == ||[youtube(j7UFaHNaXaQ)]|| ||[[Hotel California(노래)|Hotel California]] 커버 영상.|| 오해가 없도록 미리 써두자면, 80년대의 기타 실력은 주로 [[속주]]와 화려한 손가락 움직임을 자랑하던 [[잉베이 맘스틴]]이[* 그래서인지 김도균은 잉베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본인 입으로 스윕피킹 따윈 쓸데없는 짓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다.] 불러온 속주 광풍 때문에 1980년대 내내 한국의 록 음악 팬들 사이에선 무조건 '''빨리 치는 놈이 최고다'''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이게 어느정도 사그라든 건 90년대 [[너바나(밴드)|너바나]]를 선두로 [[얼터너티브]]가 등장하면서부터다. 그래서 현재의 관점이나 평가로 보면 80년대의 3대 기타리스트들의 과거 연주들은 빨리 치는 면 이외에는 여물지 못한 측면이 있었고, 그 이후에는 속주마저도 이후 세대들에게 밀린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때 3대 기타리스트란 명성에 허명은 아니라 신대철은 아버지 신중현 밑에서 어릴 적부터 기타를 만져왔던지라 속주가 장점 중 하나일 뿐이지 속주가 전부인 기타리스트는 아니었고, 김태원의 경우는 사실 한국 감성에 맞는 여러 명곡들을 작곡한 작곡가로 더 유명하지 속주 이외의 연주적 기량 자체는 3대 중에선 높게 쳐줄수는 없었다. 반면, 김도균은 속주의 측면보다 '''표현력''' 면에서 단연 당대 최고 중 하나라고 평가받았고, 다른 부분에서도 우수했기에 80년대 기준으로 보면 순수 기타 실력으로 3인을 비교했던 것이다. 다만 총체적으로 보았을때에도 기타리스트로서의 연주력은 3대 중 누가 최고냐하면 신대철이냐 김도균이냐인데 역시 김도균을 좀 더 높게 쳐줄 수 밖에 없다. 이는 3인의 행보를 본다면 3대 기타리스트라기보다는 3대 밴드 리더에 가까운데, [[부활]]과 [[시나위]]를 몇십년 동안 유지하며 밴드의 리더 및 작곡가로서의 성격이 더 강했던 [[김태원(음악인)|김태원]]이나 [[신대철]]에 비해. [[백두산]]에서는 보조적인 역할을, 그외 자신 중심의 밴드의 경우 오래 가지 못했던 김도균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연주가로서 기량을 단련하고 유지했던 기간이 둘에 비해 훨씬 길었기 때문도 있다. 즉, 전성기 기준으로도 연주력에 있어서는 3인 중 최고라는 평이 제법 있었는데, 그걸 수십년의 세월 동안 갈고 닦은 현재 시점에서는 기타리스트로서의 기량은 최고라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의 기타 연주들을 보면 정말 잘쳤을 경우엔 감정을 아예 기타에 담는 예술의 수준이다. 특히 표현력은 세계 기타리스트 중에서도 내로라 할 정도다. 락의 불모지인 한국의 기타리스트라 저평가 받는 게 아쉬울 따름. ||[youtube(3-X7wUK756I)]|| 기타 연주 중 [[보틀넥 주법]]을 이용해 [[가야금]]의 음색을 재현하기도 한다. 그것도 베스터에서 나온 메탈에 특화된 세팅에 플로이드 로즈 장착한 하드락 편향적인 기타로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