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대중/일생 (문단 편집) === 거듭되는 대선 낙선 === || [[파일:external/www.ilbe.com/f2381fccdca39ecc718b90e9e4464873.jpg|width=200]] || [[파일:external/www.ilbe.com/b865d38b669aa5ac1a3b12ddb91f431f.jpg|width=200]] || [[파일:external/www.ilbe.com/d0e0df873818603b41e4b4eeb529bc3a.jpg|width=200]] || [[파일:external/www.ilbe.com/1276dc26d608a0708f542d67c8b1985f.jpg|width=200]] || ||<-4> 김대중의 역대 대통령 선거별 포스터. 좌측부터 7대 - 13대 - 14대- 15대 ||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전두환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면서[* 노태우가 발표한 6.29 선언.] [[대한민국 제5공화국]]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민주화 가능성이 열리자, 김대중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또 다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이 지난 몇 년 동안 오랜 미국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김영삼은 국내에서 민주화 운동을 사실상 이끌었고, 김영삼을 따르는 야당 의원 숫자도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야권에서는 김대중에게 양보를 권유하는 분위기가 상당했다.[* [[김수환]] [[추기경]] 역시 양보를 권유했다. 김 추기경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가 단일후보로 추대되면 군부가 용인하지 않으면서 아예 대선후보에서 강제사퇴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는 내용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그래서 재야의 중립적인 인사들이 중심이 된 ‘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가 동교동과 상도동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 끝에 김대중은 마침내 김영삼과 단일화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그 합의는 성사 직전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추진위원회 대표의 한 사람이던 [[장을병]] 전 민주당 대표의 회고에 따르면, 재야에서는 김대중에게 양보를 하라는 쪽으로 계속 설득했고, 마침내 김대중도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김영삼이 대선 후보를, 김대중이 당권을 맡는다는 합의가 이뤄져 기자회견만 앞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영삼이 딴소리를 하고 나왔다. 1971년 선거 때 대선 후보는 김대중, 당권은 유진산이라는 식으로 분리하다 보니 당과 선대위 사이에 손발이 맞지 않았던 예도 있으니까, 후보도 당권도 자신이 전부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단일화는 성사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무산되고 말았다.”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7042.html|#관련기사 링크]]] 결국 이로 인해 김대중은 김영삼과 결별, 단독 출마를 결심하게 되었다.[* [[민주정의당|민정당]] 후보로 출마한 [[노태우]]가 과거 DJ의 선거참모를 지낸 '''선거의 귀재''' [[엄창록]]을 찾아가 자문을 구했지만, 엄창록은 "양 김이 모두 나온다는데 내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며 거절했다는 후문.] 김대중을 평생 아프게 꼬집었던 단어 중 하나인 '''대통령병 환자'''가 이 무렵에 나온 말.[* DJ가 과거 [[웅변]]교습실을 운영했을 시절부터 함께한 동지 [[김상현(1935)|김상현]]이 이때 실망감을 표하며 김영삼에게 갔다가, 3년 후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다시 돌아오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관계가 되고 만다.][* 특히 줄곧 여론조사 선두를 달리다 막판에 뒤집힌 YS 측은 데이터 분석 역량의 한계를 느끼고 [[김현철(1959)|김현철]]의 주도로 여론조사 및 정책개발 기관인 [[여의도 연구소]]를 설립한다.] 어쨌든 이렇게 '''지지층이 겹쳤던''' 양 김이 모두 출마하자,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점점 군사독재를 심판, 평가하는 자리가 아닌, 지역 간의 이권과 '''예산'''[* 이기기만 하면 '''이름 모르는 예산'''도 내려보낼 수 있었으니...]의 "기득권 싸움" 성격이 가미되어 갔으며,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 지역대결 구도[* PK 지역은 김영삼을, 호남 지역은 김대중을 지지.]가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DJ 측에서는 [[제13대 대통령 선거#s-3.1.4|4자 필승론]]을 내세워 호남을 결집시킨 뒤 '''격전지 수도권'''에서 이기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보고 수도권에 공을 들였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경기지역 민심은 여권의 [[노태우]]에게 가장 많은 표를 주었으며, 결국 김대중은 3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이렇게 김대중과 김영삼이 대립한 결과, 문민 정권 교체가 확실시되던 상황에서 또 다시 군부 출신의 여당 인사 노태우 후보가 역대 최저 득표율로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토록 수많은 시민이 군부세력의 척결을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분열로 인해 이를 무산시킨 것 때문에 당시 김대중은 김영삼과 함께 진보 지식인들에게서 큰 비난을 받았다. 이에 다시 총선부터 우위를 점해 함께 노태우 정권을 견제하자는 취지의 단일화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이마저 결렬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당([[민주정의당|민정당]])의 연이은 부정 스캔들이 불거지는 호재(?)가 잇달았고, 각 대학 운동권이 김영삼보다 김대중을 더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김대중의 [[평화민주당|평민당]]은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과 호남을 석권, 김영삼의 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올라서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민정당 125석, 평민당 70석, 민주당 59석, 공화당 35석의 '''여소야대''' 국회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이다. 이후 [[정대철]], [[조세형(정치인)|조세형]], [[박상천]], [[신기하]], [[이해찬]], [[이상수(정치인)|이상수]], [[조윤형]], [[한광옥]] 등 평민당 국회의원들은 각종 청문회에서 활약하고, 개혁 입법에 앞장서는 등, 민주화 정국을 주도하였다. 또한 [[노태우]] 대통령이 갈등 대신 여-야 간 협력의 '''온건노선'''을 선택함에 따라, DJ는 제1야당 당수로서, 국정운영의 동반자로서 그 어느 때보다 정부에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었다.[* 총선 후 YS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정권 '''중간'''평가에 DJ가 제동을 걸었던 것도 이 무렵이다.] 하지만 1990년, [[3당 합당]]이 이루어져, 여소야대 → 여대야소 국면으로 판도가 달라지자 상황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노태우의 합당제의를 거절한[* 노태우 대통령과 인척이자 6공화국의 실세였던 [[박철언]] 의원(법조인 출신)의 주장으로 DJ에게 먼저 제안이 들어왔었다.] 김대중에게, 이제는 단독 개헌선을 넘을 정도로 강해진 슈퍼 여당, [[민자당]]이 더 이상 손을 내밀만한 여지는 없었던 것.[* 일례로 1991년에 이미 합의되었던 지방선거마저 새로운 여당([[민자당]])측이 연기하려고 하자, 평민당 측이 이를 결사저지해, 겨우 1991년에 기초의원선거와 광역의원선거를, 1995년에 전국 지역자치단체장을 선출하는 제1회 지방선거를 치르는 것으로 결정되는 해프닝이 있었는데, 이러한 과정을 지켜본 세인들은 이미 정국의 주도권이 거대 여당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래도 4.19의 상징적인 인물인 6선의 [[이기택]] 의원이나, 유능한 법률가이자 영남권의 촉망받는 정치인이었던 [[노무현]][* 김영삼이 노무현을 공천하여 정계에 입문했으며, 사적으로도 김영삼이 노무현을 무척 아꼈다고 한다.] 등 3당 합당에 반발해 잔류한 8명의 [[통일민주당|민주당]] 의원이[* 잔류 초기에는 평화민주당과도 선을 긋는 독자노선을 추구하며 1991년 지방선거에서 단일화없이 따로 기초-광역 의원 후보를 냈지만, 민자당에 대한 여론이 나빴음에도 저조한 투표율로 인해 수도권에서 예상 못한 참패를 하였다. 이를 계기로 Main-stream을 벗어난 조직력의 한계를 실감, 강한 단일 야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의를 선택했던 것.]과 김상현이 DJ의 민주당으로 합류하는 등의 인적(人的)인 소득은 김대중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 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의 [[민주당(1991년)|민주당]]은 민자당의 과반확보를 저지하는 등 선전을 거두면서 YS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며, 수도권과 호남에서 우위를 점하는 등 기염을 토하였다.[* 5년 전 DJ 측에서 [[제13대 대통령 선거#s-3.1.4|4자 필승론]]으로 주장했던 바로 그 구도이다.] 이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대화합정치'를 기치로 한 <뉴DJ플랜>을 내세웠다. 그는 기자의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 비리 등에 대해 진상은 밝히되 정치 보복은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과연 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건 저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나쁜 제도는 고치되 사람은 처벌하지 않는게 30년 군사통치가 갈갈이 갈라놓은 우리 국민을 재결합시키는 길입니다."라는 입장을 밝혔으며, '뉴DJ'에 대해서는 "시대 변화에 맞추어 중도우파적 온건노선을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일부 진보그룹 출신 의원들은 당의 색깔을 너무 우경화시키려 한다는 불만을 보였다고 한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2110100239103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11-01&officeId=00023&pageNo=3&printNo=22156&publishType=00010|#]][[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2111800239103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11-18&officeId=00023&pageNo=3&printNo=22173&publishType=00010|#]] 하지만 결국 라이벌 YS를 넘지 못하고 8% 차이로 패하고 말았다. 이미 예순아홉의 고령이었던 DJ는 아내 이희호 여사와 함께 쓴 정계 은퇴선언문을 읽었다.[* 조선일보같은 대표적인 보수 언론사도 92년의 은퇴 순간만큼은 민주화의 거장에 호의적인 보도를 내보냈다. 그러나 [[강준만]]등이 언급했듯, 보수 언론사가 92년의 은퇴를 호의적으로 보도한 것은 김대중이 다시는 정계에 복귀하지 말 것을 내포한 뜻이었고 그렇게 되면 야당은 정권을 잡을 수 없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기에 서술한 논평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듬해인 1993년 1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