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단야 (문단 편집) === 스캔들 === 1926년 8월 모스크바로 간 김단야는 그곳에서 고명자와 재회한 뒤 사실상 부부로 살았다. 그는 국제레닌학교에 다녔고 고명자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1928년까지 대학을 다니던 두 사람은 코민테른이 1928년 12월 조선 공산당 운동의 기조를 바꿔 인텔리들의 결사체였던 조선공산당을 해체하고 공장과 농촌으로 들어가 노동자와 빈농을 조직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주도하는 계급정당으로 재건하라는 내용의 '12월 태제'의 임무를 받들어 1929년 1월 모스크바를 떠났다. 고명자는 1929년 2월 조선으로 잠입했고, 김단야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코민테른 비서부에서 당 재건 작업에 전념하다가 그해 7월 국내로 잠입, 11월 [[박민영]], [[권오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1930년 2월 일제 경찰의 검거령이 내려지자, 그는 검거망을 피해 다시 국내를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그가 모스크바에 돌아왔을 때, 동지 [[박헌영]]과 [[주세죽]]도 모스크바로 망명해 있었다.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이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한산 스님에게 들었다는 내용에 따르면, 박헌영 부부는 하나뿐인 하숙집에서 김단야와 함께 숙식했는데 얼마 후 주세죽이 김단야의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원경 스님에 따르면 박헌영은 이 사실을 알았지만 김단야의 친구이자 혁명동지로서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주세죽과도 형식적인 부부관계를 지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이는 몇 년 뒤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증언이 사실임을 입증할 증거는 없다. 세 사람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로 가서 고려공산당 기관지 '콤뮤니스트'를 발행했다. 그러던 1933년 7월 5일, 박헌영이 상하이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 박헌영이 시간을 끄는 사이 김단야와 주세죽은 가까스로 탈출해 체포를 면했다. 박헌영은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과거 행적을 감추기 위해 자신이 5년 전에 체포되었던 박헌영과 동일 인물이 아니라고 계속 잡아똈다. 결국 일본 경찰은 동일인물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하고 1934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녁 6년형을 선고했다. 한편, 주세죽은 박헌영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 거라 여기고 모든 걸 체념했다. 이때 김단야가 함께 모스크바로 가자고 제안했고 주세죽은 이에 동의했다. 이후 김단야는 1934년 주세죽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돌아간 뒤 결혼했다. 당시 그는 박헌영이 살아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를 주세죽에게 알리지 않고 숨겼다. 또한 그에겐 아내 고명자도 있었지만[* 당시 그녀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1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친일잡지인 <동양지광(東洋之光)>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존재를 무시하고 주세죽과의 결혼을 감행했다. 당시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이 추문을 두고 김단야와 주세죽을 맹비난했다. 하지만 정작 박헌영은 신경쓸 것 없다며 넘어갔다. 훗날 1939년에 출옥한 박헌영에게 친척들이 주세죽의 행방을 물었을 때, 그는 주세죽이 죽었다고 답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