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낙현 (문단 편집) === 아마추어 시절 === 당시 약체팀이었던 여수화양고등학교로 진학하여 화양고를 강팀으로 이끌었다. 청소년 대표팀에서부터 허훈과 주득점원으로 활약하며 공격 능력에 있어서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왔다. 이때부터 허훈과 라이벌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고3 때 원래 스타일인 공격적인 플레이를 버리고 퓨어 포인트 가드 스타일로 뛰며 당시 14학번 가드 랭킹에서 밀리기도 했다. 허훈을 필두로 전주고 이우정, 경복고 이민영에 비해 평가가 낮았다. 그래서 [[고려대학교]] 진학 당시에 여타 선배들처럼 큰 기대를 받지는 못했다. 이후 [[고려대학교]]에 진학하여 1학년 신입생때부터 식스맨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기대치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여준 것. 특히 1학년 시절부터 이승현과 함께 팬들 사이에선 고려대에서 특유의 강심장과 싹수있게 플레이하는 선수로 평가받았다. 고려대의 경우 랭킹 1위를 하던 선수들도 1학년 때부터 플레이타임을 보장받기 힘든데 김낙현은 저학년 때부터 출전 시간을 보장받았다. 그만큼 실제 고교 랭킹에 비해 대학에서 좋은 성장세를 보여준 선수 중 하나다. 3학년 시절에는 [[이종현(농구선수)|이종현]], [[강상재]]와 함께 정규리그 [[전승|무패]] 우승을 이끌었다. 4학년때에는 팀의 주장을 맡아 활약하였다. 정규리그 15승 1패로 우승을 차지하였고, 본인은 정규리그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였다. 사실 리그 개막 전까지 고려대의 예상 순위는 4강권이었다. [[연세대]], [[중앙대]]에 전력이 밀린다는 평이었으나 김낙현의 클러치 능력이 팀을 여러 번 살렸다. 그간 고려대 가드들이 우승의 조력자였다면, 김낙현은 우승의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정기전과 챔피언 결정전에서 특별히 활약하지 못하며 대학 막판 평가가 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