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근태 (문단 편집) === 정계 입문 === 1995년 초에 들어 자신을 따르는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당(1991년)|민주당]]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맡으면서 제도권 정치를 시작하였다. 그해 연말에는 특별사면에 따라 복권되고 [[김대중]]이 전격적으로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민주당을 탈당하고 국민회의에 합류하였다. 다음해인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도봉(갑)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당 주류인 [[동교동계]]를 겨냥해 호된 비판을 퍼부었다. 특히 [[권노갑]]이 주 타깃이었다. 물론 권노갑은 김근태 외에도 [[천정배|당내]] [[신기남|소장파]] [[정동영|인사들이]] 주된 타깃으로 삼던 정치인이긴 했지만. 동교동계가 그를 견제하면서 결과적으로 이 시기 정치적 성장을 그다지 하지 못한다. 기자들이 뽑은 대통령 후보로서는 [[조선일보]]도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1/02/2012010201584.html|부고논평]]에서 인정할 정도로 항상 1위를 도맡아 했던 인물이지만, 당내 세력과 권력욕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고 평가 받는다. 그가 [[선종(가톨릭)|선종]]한 후 아내인 [[인재근]] 의원을 중심으로 그와 교류한 정치인들이 결집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도 차세대 정치인으로 주목받으며 중진으로 자리매김 했던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과 비교되는 대목. 아예 그쪽 편이던 이인제는 차치하고라도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결국 대통령 자리를 차지한 [[노무현]]과 비교해도 안타까운 점이다. 2000년 후반에서 2001년 연말까지는 [[이인제]]에 맞설 이른바 비주류 대표인사로 두 사람의 동정과 대권전략이 정가의 주요화제이기도 했다. 2002년에는 [[제16대 대통령 선거#s-3.1|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제주와 울산 2번의 개표결과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자 운명의 광주경선을 앞두고 중도 사퇴하였다. 경선 과정에서 자신이 [[권노갑]]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양심선언'한 뒤, 경선 주자들에게(특히 권노갑이 지원하고 있던 [[이인제]]를 겨냥해) 정치자금 문제를 다 까보자고 말했다가 역풍이 분 것이(...) 치명타였다. 이인제 대세론을 흔드는 노풍이 분 것은 덤. 이 사건은 당시 [[한국/정치]]가 정치자금 문제에서 얼마나 골때리는 상황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종종 언급된다. 존경 받던 재야 운동가이자, 정계에서 가장 깨끗한 정치인으로 꼽히던 김근태마저 불법 정치자금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훗날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상징색이라 할 수 있는 노란색은 원래 김근태 경선캠프의 상징인 노란 손수건에서 일부 차용 혹은 의미를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다. [[참여정부]]에서는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입각하였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공약 중 하나였던 주택 분양원가 공개 방침을 번복하자 "'''[[계급장]] 떼고 제대로 논쟁하자'''" 라고 요구하는 등 대통령 당선 후 신자유주의 친화적으로 변한 노무현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가장 강하게 브레이크를 걸었던 인사 중 하나였다. 때문에 당시 온라인상에서 [[물뚝심송|고문 후유증 드립치는 안티]]에게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mbsIdx=3666989&cpage=1&mbsW=&select=&opt=&keyword=|인신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2007년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도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96829.html|"FTA를 통과시키려거든 나를 밟고 가라"]]라고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 점 때문에 재야 출신으로 정치권에 들어가 몇 안 되게 자기 목소리를 낸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그 때문인지 친노, 특히 그 후계를 자처하는 [[친문]] 지지자들은 김근태의 뜻을 이어받는 비노비문 그룹 중 하나인 [[민평련]]을 크게 견제 하는 모습을 보인다. 민평련에 대한 반감은 김근태 개인에 대한 반감 외에도 친문 인사 대부분이 소위 '패권주의' 논란을 의식해 극도로 조심스레 처신하는 반면 민평련은 대놓고 계파를 드러내고 단체행동을 하는 데 대한 못마땅함도 크다. 비록 김근태 사후 민평련이 당 전면에 나선 적은 없긴 하지만. 대놓고 싫어한다. 그나마 우호적인 시선이란게 '민주화 운동가의 공적은 존경하나 정치인으로서는 존경하지 못한다'라는 수준이고 아예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주장이 김근태가 사망한 이후에도 많이 나왔다. 김근태가 대선후보로서 2% 지지율이 나오고 18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조차 되지 못한 것은 친노 시민들이 투표장에 안 갔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을 정도다. --친박이 [[문국현]], [[강기갑]] 당선에 일조했다면 친노는 [[신지호]] 당선에 일조한 셈이라는 썰이 있지만 모두 낭설일뿐이다.-- 다만 18대 총선의 경우는 당시 서울은 성북구를 제외하고는 민주당 강세 지역구들이 전부 한나라당으로 넘어갔던 시기였다. 성북구를 제외하고는 갑이나 을 지역구 하나만 건졌다. 아예 통째로 넘어간 지역구들도 많다. 수도권 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민주당이 전멸했던 시기] 그리고 이후 이인영등 민평련과 친문이 손을 잡는 케이스도 많기 때문에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친노가 김근태를 싫어한다는 내용은 낭설에 불과할 뿐, 실제로 친노지지자들에게도 여전히 존경받는 존재라는 평이 압도적이다.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국개론]]스러운 발언을 했다가 사과하는 등 말도 많았고, 2006년 [[열린우리당]]이 쇠퇴 일로를 걷는 와중에 당 의장 직에 올라 당시 당정에 대한 여론의 뭇매를 집중적으로 받기도 했다. 다만 다른 정당들이라면 단명 소리를 들었을 그의 재임기간 8개월은, [[열린우리당]]에서는 최장기이다. 또한 여러 나름대로 의미 있는 법들을 조율해서 통과시키기도 했다. 보건복지부 장관을 재임한 기간도 1년 7개월로 다른 장관들보다는 비교적 긴 편이었다. 전임인 [[김화중]]의 재임 기간은 1년 4개월, 후임인 [[유시민]]의 재임 기간은 1년 3개월이었다. 3회에 걸쳐 국회의원을 지낸 다선의원이었지만 인생 마지막으로 도전한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신지호 후보에게 1,000여 표 차이로 석패했다. 사실 [[경기동부연합]] 계열 [[민주노동당]] 후보도 이 지역에 출마해서 대략 1,000여표를 차지했다는 걸 감안하면, 꽤나 아까운 패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