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규식 (문단 편집) === 납북과 사망 === 1950년 [[6.25 전쟁]] 중 [[9.28 서울 수복]] 직전인 9월 26일 밤 [[조선인민군]]에 [[납북]]되어 [[평양]]을 거쳐 북쪽으로 계속 끌려가던 중 그 해 12월 10일 [[자강도]] [[만포시|만포군]] 만포면 별오동(현 자강도 만포시 별오동)에 있던 군 병원에서 지병인 [[천식]]을 비롯해 [[뇌출혈]], [[동상]] 등 이런저런 병명으로 병사했다.[* 1991년 10월 1일 공개된 전 북한 정무원 부부장(차관급)을 지내다가 1980년대 중반 망명한 박병엽(朴炳燁, 필명 신경완申敬完)의 구술기록 참조.[[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1002002391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1-10-02&officeId=00023&pageNo=1&printNo=21769&publishType=00010|#]] 1950년에 [[사망]]한 게 아니라 1952년까지 생존해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다. 1980년대까지 백과 사전들은 1952년 사망설을 실었으며 1980년대 말부터 북한 측의 자료나 애국열사릉의 묘비명을 보고 1950년 사망설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6.25 전쟁 직후 작성된 납북, 피랍자 신상 관련 자료에는 1952년으로 된 것으로 보아 1952년에 사망했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수백만 명이 슬퍼하며 장례가 치러진 김구의 죽음이나 여운형의 죽음에 비교하면 그의 죽음은 한참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이승만 정부]]와 이후의 군사 정권에서는 외면받아 오다가 1989년에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로동신문, 민주조선, 조국전선 등의 관영언론에 부고가 발표되고 국장이 거행되는 등 나름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고 하는데, 6.25 전쟁 중의 로동신문은 매우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인지 검증하기가 어렵다. [[파일:vsnqCrN.jpg]] 김규식의 묘소.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동 소재의 [[애국렬사릉]]. 뒤에 [[조소앙]]의 묘도 보인다. 사후 그의 유해는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를 세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