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규식 (문단 편집) === 미국 유학 === 1894년 한성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에 1기생으로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으며 이 시기 [[서재필]]의 [[독립신문]] 기자로 잠시 있기도 했다. 1896년 [[언더우드]]의 후원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데 당시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1897년 [[버지니아 주]]에 있는 [[루터교회]] 계열 인문대학 [[로어노크 칼리지]] 부속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웅변부 활동을 하면서 연설 경연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고 1900년 [[로어노크 칼리지]](Roanoke College)으로 진학하여 [[문학]] 동호회 데모스테니언 문학회의 회장이자 1903년 전체 3등으로 학사를 취득했으며 재학 중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서자 [[의친왕]](義親王)과 만나 교우 관계를 형성하였다. 훗날 [[3.1 운동]] 직후 [[김가진]]을 일제의 감시에서 빼돌려 [[망명]]시킨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1919년 11월 대동단[* [[인천광역시|부평]]군수를 지낸 바 있는 전협을 필두로 조직된 소규모 독립운동 조직.]을 통해 의친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고 시도한 일이 있었는데 김규식이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였다는 점과 이 시절 [[의친왕]]과 모종의 교류가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흥미로운 일이다. 미국 [[유학]] 당시 김규식은 고국에서 언더우드가 후원하는 학비에만 의존하지 않고, 등록금과 기타 학비를 노동을 하여 스스로 마련하였다. 학창시절의 학력 평점은 92.2점을 유지하였으며 1903년 6월 [[로어노크 칼리지]]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당시 성적은 전체 3등이었으며,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학사였다. 1903년 대학 졸업 직후 미국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입학해 1905년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김규식 박사라 불린 것은 이후에 모교인 로어노크 대학에서 받은 명예 철학 [[박사]] 학위 때문이다.] 프린스턴 대학원에서는 김규식이 박사 학위 과정에 진학하면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었고 본인 역시 박사 학위까지 공부할 생각이 있었으나 당시 정국에 대해 걱정했던 그는 '''"조국의 앞날이 염려된다"'''는 한마디를 남긴 채 귀국했다.[* 한국에서 근대식 [[교육]] 과정의 박사 [[학위]]를 최초로 받은 것은 [[이승만]]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것이 1910년이었으므로 만약 김규식이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까지 계속 밟았더라면 한국 최초의 박사 영예는 김규식이 가져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귀국 직후 [[YMCA]] 학교 학생부 담당 겸 간사(학관의 학감)를 지낸다. 뛰어난 영어 실력 덕분에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장학금과 [[도쿄외국어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직을 제의받으나 거절한다. 조선총독부는 다시 사람을 보내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동양학과의 장학금을 제의하였으나 김규식은 모두 거절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지난 세월 나는 미국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었지만, 지금부터는 조선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