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규식 (문단 편집) == 기타 == * 임시정부 소속이었는데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 둘 다 참여한 몇 안 되는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여운형은 남북연석회의 이전에 암살당했다. 단, 좌우합작 추진 과정에서 남북합작까지 해야겠다고 홀로 5번 북행길에 오른 적이 있었다.] 독특한 입지를 지녔다고 볼 수 있으며, [[러일전쟁]]을 예견하거나 [[모스크바 3상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등 외교적 식견이 뛰어났다고 볼 수 있지만 정치를 할 만큼 통이 크지 못했다고 한다. * 몸이 약해서 항상 아팠다고 한다. 간질 증세가 수시로 일어났고 뇌종양 수술도 받고 신경통,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미군정]] 쪽에서 그에게 붙인 별명은 sickly(약골)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Kim Kiusic이라고 썼는데 미묘하게 비슷하다. 광복 후 어느 [[기자]]가 그와 인터뷰를 하는데 어디가 편찮으신 것이냐고 물었더니 김규식은 "차라리 안 아픈 곳이 어디냐고 묻는 게 더 빠를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장죽 [[담배]] 피우기를 즐겼다. 남북 연석 회의 차 북한에 가서 장죽 담배를 물고 문서에 서명한 일도 있었다. * 처음에는 [[좌우합작운동]]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북 분단과 좌 - 우 정치적 지형이 극단화되어갈수록 이대로 있어서 안된다는 생각에 총대를 메고 나서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일화 하나로 1946년 어느날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찾아와 좌우 합작을 권하면서 당시로는 큰돈인 50만원인가를 내놓자, 애연가인 김규식은 2자나 되는 긴 담뱃대를 집으면서 "형님은 대통령이나 하시오. 나는 대통(장죽 담배)이나 즐기겠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승만에게 "형님은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 댈 것임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독립 정부를 세우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소"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출처: 조규하 등, '남북의 대화', 1972년-][[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6453|#]] * 어학의 [[천재]]로 다국어에 능했고 [[영어]]를 매우 잘해서 [[미군]]이 놀랄 정도였으며,[* 미국 동부 억양에 가까운 영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프린스턴 유학생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장준하]]의 회고록 <돌베개>에 따르면 [[충칭]] 임시정부 시절 [[김구]]의 주선으로 [[장준하]]는 [[충칭]]에 체류하고 있는 [[미국]]의 선교사들과 잡지 [[타임(주간지)|타임]]의 기자들을 만나 한국의 기독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이 때 [[장준하]]의 영어통역을 전담해준 사람이 김규식이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장준하]]를 비롯한 일본 유학파 학도병들의 경우 이 당시 기준으로 고학력 엘리트였던 것은 맞지만 일본식 영어교육을 받은 탓에 영어발음은 [[재플리시]]식 발음인 경우가 많아 회화에는 굉장히 서툴렀다.] 임시 정부 활동 시절에 임정 요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신채호]]도 김규식에게 영어를 배웠는데 김규식이 발음이 틀렸다고 자꾸 지적하자 신채호는 단어 뜻만 알면 되지 발음은 뭣 하러 공부해야 하느냐고 서로 싸웠고, 신채호는 [[이광수(소설가)|이광수]]한테 영어를 배웠다.[* 이 때만 해도 이광수는 친일파로 변절한 단계가 아니었으므로 문제될 건 없었다.] * 임정 시절부터 [[여운형]]과 형님 아우님 하는 매우 친한 사이였다고 하며,(여운형이 5살 아래로 동생이다.) 여운형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 그의 부인이 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할 만큼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한국민주당]]과 [[공산당]]에서는 그가 [[일본인]]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루머를 내서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 의외지만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fs_006_0010_0290|1946년 4월 25일에 칼로 자살을 기도했다.]] 실패 이유는 이웃 사람이 방으로 뛰어들어 칼을 빼앗았기 때문. 사실 4월에는 김구나 이승만도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fs_006_0010_0100|민족적 각성을 위해 자결을 고려한 바가 있었다.]] * 성격이 매우 차갑고 냉소적인 편이라 인간적으로는 친해지기 어려웠다고 한다. 전형적인 학자풍의 성격으로 정치인의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 당대 인물들의 주된 평. 후일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 대행 겸 총리를 지낸 우양 [[허정]]은 그를 두고 '매우 냉정한 분' 이라는 짧은 평을 남겼다. 또 매우 현실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일평생 정치 생명을 담보로 모험하지 않았다. 여운형과 좌우 합작을 주도한 탓에 원조 통일 정부론을 주장한 대표격 인사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실제론 제의를 받고도 매우 망설였다고 한다. 실제로 남북 협상 당시에도 맹동적이었던 김구와 달리 일찌감치 북한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매우 현실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 좋게 말하면 현실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인 성격이었던 셈이다.[* [[장준하]], [[김준엽]]의 절친이자 해방정국 때 [[이승만]]의 공보비서로 활동했던 최기일 교수 또한 본인의 상사였던 [[이승만]]보다 오히려 김규식의 식견과 정치적 노선이 훨씬 합리적이었지만 김규식 특유의 소극적인 성격때문에 제대로 현실화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고 평가했다.] * 남북협상 참여 후 정계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원세훈 등 김규식 계열의 정치인들이 정계에 진출해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할것을 권유하였다. 6.25 전쟁으로 김규식 계열의 정치인들이 대거 납북되어 명맥을 잇지는 못했지만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거 당선되는 등 많은 지지를 얻었다. * 기본적으로는 깐깐한 원칙주의자였으나 의외의 면도 존재한다. 그 일화로 허정의 증언을 들 수 있다. 다른 임정 요인들과 함께 경교장을 방문한 허정은 김규식이 '''아들 김진동과 맞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고 [[충공깽]]에 빠졌었다고.'''[* 지금이야 시대가 변하였기에 그나마 높은 사람 앞에서 담배를 (그래도 최대한 눈치보면서)피울 수 라도 있지만 당시에 자신보다 낮은사람이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 따귀를 맞는 일이 당연시 되던 시절이었다.] 이에 대해선 아마 그의 투철한 자유주의 사상 관에 입각한 평등 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추측만 이어질 뿐이다. * 민족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매우 냉소적이었다. 민족 스스로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민족 그 자체에 예찬적인 태도를 견지할 의무를 강요할 필요는 없다. 김규식은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노력한 민족주의자였음에도 "우리 민족은 잔인하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하면 더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주장했다. 또한 그가 공산주의를 반대한 반공주의자라고 알려지기도 하는데 이는 속으로 드러난 입장이지, 적어도 공식적인 담화나 발표 글에서는 좀처럼 반공주의적인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좌익에 대한 김규식의 직접적인 언급이 별로 없는 가운데서도 몇몇 연구는 김규식을 반공주의자로 규정한 바 있다. 이때 근거로 많이 인용되는 것이 좌우 합작 위원회에서 활동한 바 있던 [[강원용]]에게 공산 혁명을 통한 여러 나라의 유혈 혁명 사례를 들어 말했다는 "우리 민족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잔인한 성정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터지면 피바다가 된다.'''"는 발언이다.] 이는 광복 이후, 당시 좌익으로부터 각종 비난과 비판이 쏟아질 때도 김규식이 정면으로 좌익을 비난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가 '''가장 중요시했던 원칙은 '민족 통일 전선과 좌우 합작'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 허례허식을 매우 싫어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자신을 지지하던 청년 하나가 찾아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자 '''"[[왜놈]]들이나 하던 짓 쓸데없이 무엇 하러 하시는가?"'''라며 일축했다고 한다. * [[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에서 임시 정부 외무 총장이자 파리 위원부 대표로 활동을 할 당시에 [[호찌민]]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호찌민이 김규식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내용의 문건들이 프랑스 정부 자료에 자세히 담겨있을 정도다. 구체적으로 호찌민을 밀착 감시하던 당시 프랑스 파리의 정보 경찰은 1920년 2월 메모에서 "호찌민이 프랑스에서 기고한 모든 글이 번역돼 중국에서 간행됐는데, 모두 호찌민이 김규식에게 부탁한 것"이라고 적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김규식은 중국 신문의 미국 특파원을 호찌민에게 연결해줘 인터뷰를 주선하기까지 했다. 또한, 당시 중국에서 발행된 신문에는 호찌민과 김규식이 서로의 집을 방문할 정도로 친밀했다는 정황이 묘사되어있기도 하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10369540|호찌민 감시 佛 경찰 문건 대거 발굴… 한국 임시 정부 활약상 생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