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귀남 (문단 편집) ==== 즉위 이후 ==== 갑자년(1864년), 왕위에 올랐다. 지난 생에 듣기로 조선이 망한 이유는 우물 안 개구리로 지냈기 때문이라 [[박규수]]에게 자신 또한 개화에 뜻이 있다고 밝혔다. 단오가 지나 조정 중신들 사이에서 [[흥선대원군]]이 주도하는 서원 철폐를 놓고 정쟁이 시작되자 막연히 서원을 학교 정도로 생각하여 조선이 망하기 전에 무식쟁이 소리 듣는 사람 줄어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서원을 확충한다'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선택지를 골랐다. 서원 확충 도중 흥선군이 경전 보급을 명분으로 만든 사병들에 개화파가 올라타 개화주의 경전을 보급하면서 개화도 순조로워졌다. 이와 같이 전생의 기억으로 어쩌다 툭툭 뱉은 말들이 광기의 시대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조선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무엇보다 흔히 북벌, 군사행동을 의미하는 '역천'을, '지금 시대가 [[제국주의|죽고 죽이는 시대]]라면 [[평화주의|그것에 거역하는 것]]이야말로 역천이 아니겠는가'라며 평화주의 기조를 마련하는 장면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자식 걱정이 조선의 국체를 바꿔버리는 경향이 있다. 아들 공부 잘하냐고 물었더니 '사람은 착하다'는 평가를 받자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 아들들이 만약 자기 다음 대에 권력싸움이 일어나면 어쩌냐고 묻자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게 왕의 자리를 탐낼 가치가 없도록 만들면 된다며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바꾸라고 비밀리에 하교했다. 해석하자면 ''''너희들 왕 자리놓고 다투면 종묘사직 샷다내린다''''이고,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신하들이 머리 박는 속도가 느리면 역적으로 찍힐 정도일 거라는 팬들의 평가도 나왔다. 시간이 흘러 결국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강사 총신들과 전쟁 막을 방도를 고심했고, 끝내 구호물자 및 인력 파견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론 결집과 재정 마련에 다소 난항이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몸소 옥음방송을 하기로 결심한다. 작중 서술을 빌리자면 팔도가 멈추고 2000만의 귀가 라디오에 집중하던 차, 생방송 시작부터 방송사고[* 방송에 익숙치 않아 시작한 줄도 모르고 '''"이보게, 이거 켜져 있는 거 맞는가?"'''하고 NG를 내버렸다. 말을 할 수가 없어 안양대군이 사관의 [[만년필]]을 뺏어 '시(是)' 자를 허겁지겁 적어 들어올려 겨우 시작을 알렸다.]를 내는 해프닝을 시작으로 이왕 이렇게 된 거 진솔하게 대본은 제쳐두고 하고싶은 말을 하기로 결심한다. 처음엔 백성들에게 도의로 지원할 것을 호소했지만 조금 부족하다 싶었는지 조금 강짜를 부리기로 하여 '''"정 안되면 본인이 직접 가서 도울 것이며, 필요하다면 임금 자리도 내려 놓겠다."'''는 하늘이 뒤집어지고[* 당연하겠지만 방송 스태프로 있던 관원들과 사관, 그리고 안양대군은 방송 중간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표정이 굳어져 가다 주상의 폭탄 발언 후엔 아예 얼굴이 하얘지다 못해 새파래질 지경이 되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폭탄 선언을 남기고 방송을 끝맺는다. 그리고 당연히 전국의 여론이 뒤집어지고 유럽 전역에 식량 및 의료 지원을 행하기 위한 창의단이 최익현을 선두로 발족, 최전선 각지에 적극적인 인도적 지원을 행하였으며 이러한 시도는 유럽 전역에 염세주의와 반전주의를 흩뿌린다. 1913년, 전쟁이 거의 종식되어가던 시점에서 박은식과 김옥균과 만나 만국연합과 국제정세에 대해 심각하게 의견 나누던 중, 대사를 보내 여러 나라를 방문해서 화합을 굳히자는 의견이 나오자 누굴 보낼지 이야기 하던 중 돌연 '''"이 사람이 간다면?"'''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슬슬 왕 자리 물려줄 때''' 되었다는 혼잣말로 본인을 제외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정신을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다.[* 이때 사관이 어찌나 심하게 놀랐는지 만년필을 떨구고 경악했다. 독자들 사이에서는 하도 자주 떨구다 보니 내구도가 남아날지(...)를 걱정하는 소리까지 나온다.] 이후 헐레벌떡 찾아와 머리부터 박고 만류하는 이척과 안양대군에게 나도 이제 중전과 해외여행 좀 가보자고 투덜거리다 군밤으로 살살 달래기로 한다. 안양대군이 마침 오고 있던 김옥균에게 말려달라고 통사정하지만 김옥균은 말리는 걸 포기하는 걸 넘어 아예 본인이 부추기고 있는 상황. 1913년 5월 왕위를 왕세자 이척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된 후, 중전 민씨와 함께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만국연합 첫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해외순방을 떠나 대남, 청, 유구, 일본, 소련, 유럽 각국, 터키, 이집트, 인도, 태국을 거쳐 귀국, 1년 휴양 후에는 미국과 하와이, 기타 아메리카 대륙 순방을 다녀온다. 1919년 1월 21일, 원 역사대로라면 이 날 훙서(薨逝)했겠지만, 쌓아온 덕이 많아 비명횡사하지 않고 오랜만에 나타난 북악산 산신령과 함께 귀남의 몸에 들어간 진짜 구름재 명복의 인생을 보러 잠깐 혼만 빠져서 미래로 갔다. 사후 원 역사처럼 묘호로 고종을 받았다. 그만한 공적이라면 마땅히 '조'로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머리 온전한 사람이라면 선왕의 묘호가 종이라 하여도 털끝만큼의 의심 품지 못할 것이요, 선조/인조가 "조" 자를 달고 있다지만 선왕께서는 세종대왕과 나란히 서시고도 도리어 모자랄 정도이니 조종의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어 그대로 고조가 아니라 고종이 됐다[* [[시법]]에서 고(高)에 대한 특별한 문구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으뜸'''이라는 의미를 담은 시호로 다른 시호에 비해서 시호를 받은 왕을 높이는 표현이다. 베트남과 한국사에서 고종이라는 이름을 받은 왕의 치세가 영 애매했다는 것이 예외일 정도. 즉, 이 작품에서는 고종(김귀남)은 '''올바른 평가를 받은''' 시호를 얻은 셈이 된다.]. 파킨슨 병에 걸렸으나 귀남의 묘호가 정해질 때까지는 살아있었던 김옥균은 평범과 비범의 구분을 무너뜨리게 되었으니 묘호를 정하는 일마저 그분 답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여담으로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말하기를 귀남이 훙서하였을 때 저 바다의 수면이 조금은 높아지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팔도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