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구/평가 (문단 편집) == 해방정국 이후 활동과 반탁운동에 대한 평가 == 해방 이전의 행보와는 달리 해방 이후의 김구의 행보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리는데 그의 대표적인 활동이었던 신탁통치 반대 운동과 남북협상 두가지 모두 좌우 진영의 평가가 크게 엇갈리고 있다. 김구는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가 알려지자마자 가장 격렬하게 반탁운동을 주도할 정도로 반탁운동에 열성을 보였는데 이에 대해 찬성측에서는 신탁통치는 민족자존심상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반탁운동을 한 것이 옳았다고 주장하고 반대측에서는 민족감정에만 치우쳐 5년 정도의 신탁통치(또는 후견제)를 감수하더라도 남북한의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해 분단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다고 비판한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은 기본적으로 동아일보의 오보 및 왜곡보도로 인해 제대로된 사실 전달이 되지 않았다. 오보에 따라 김구는 이승만과 더불어 반탁운동을 전개했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분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책임은 왜곡보도를 한 언론에게 책임이 있지만, 삼상회의 보고가 이후 정정보도가 나왔음에도 계속해서 반탁운동을 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일각에서 주장하는 비판의 논지다.] 다만 김구의 정치적 수완에 대해서는 부정적 평가가 주를 이룬다. 김구의 반탁운동은 반공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한 이승만의 반탁운동과는 달리 임시정부가 법통을 인정받아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정부를 세우는 데에 목적이 있었는데 문제는 그것이 도저히 실현이 불가능한 수준의 목적이었다는 것이었다. [[미군정]]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군정을 부정하는 임시정부 법통론을 지지해 줄 이유가 없었고 [[소련군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또한 임시정부는 당시 독립운동 단체 중 한개로서의 인지도나 지지는 있었지만, 정부로서 전 민족의 지지를 모을 수 있을 만한 상징성을 갖고 있거나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구의 완고한 임정법통론 및 반탁운동은 결국 그가 정치적으로 고립되고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크게 보면 좌우의 극심한 분열과 남북의 분단으로까지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강력한 반공주의자였지만 동시에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김구는 공산주의자들과는 타협할 수 없다며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과는 달리 남북의 분단에는 결사코 반대했다. 그리고 [[1948년]], 이승만과 결별하고 대신 [[김규식]]과 합작해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과의 협상을 통해 남북의 분단을 막기 위한 남북협상을 시도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 오늘날에는 김구의 남북협상이 자신들의 정권의 명분을 세우고 선전하려는 [[북한]] 및 [[김일성]]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식의 평가가 많다. 실제로 남북협상은 남북한의 단독 정부 수립을 막아내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김구가 분단에 반대하며 가장 우려했던 것이 '''남북 간의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김구가 암살된지 1년만에 [[6.25 전쟁]]이 발발했음을 생각하면 김구가 단순히 이승만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나 정치적인 이해관계만을 이유로 남북협상에 나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948년]]은 이미 좌우의 대립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남북한의 단독정부수립이 기정사실화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김구가 나선 시점이 '너무 늦었다'는 평가는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의 정치인들이 대화를 시도했다는 의의와 분단을 막지 못하면 남북간에 전쟁이 나서 동족간에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는 미래를 예측한 혜안만은 높게 평가할만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