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건우(1963) (문단 편집) === 프로 경력 === [[파일:external/www.koreadaily.com/195911093.jpg]] [[1986년]] [[서울특별시|서울]]지역 신인 지명 때 [[OB 베어스]]와 [[MBC 청룡]]이 지명 우선권을 동전 던지기로 가렸고, 여기서 승리한 OB가 당시 신인 중 최대어였던 [[고려대학교]]의 [[박노준]]을 의기 양양하게 지명했다. 내심 박노준을 노리고 있던 MBC는 어쩔 수 없이 차선책으로 한양대의 김건우를 선택했는데, 1년 후 양측의 희비는 완전히 엇갈렸다. 계약금 2천 5백만원[* 박노준은 김건우가 받은 계약금의 두 배인 5천만원을 받고 OB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결과는(...)~~ 김건우가 계약 조건이 너무 박하다며 투덜대자 MBC 조광식 단장은 "박노준보다 좋은 성적을 올리면 시즌 후에 계약금을 더 주마"라고 조건을 걸었고, 김건우는 그 조건을 받아들이며 입단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그 해 김건우가 신인왕을 따내자 MBC 구단은 2천만원을 추가 지급하며 약속을 지켰다.]에 MBC 유니폼을 입은 김건우는 애초 [[외야수]]로 기용할 계획이었지만, [[일본인]] 투수 코치이던 [[미즈타니 히사노부]]가 전지훈련 때 투수로서의 가능성을 간파하고[* 당시 김건우가 투수로 전환하는데 비화가 있었으니, 입단 후 첫 전지훈련 때 배트를 10자루만 들고 갔었는데(배트를 포함한 개인 경기용품은 선수 자신이 자비로 충당하던 시절이었다) 며칠 만에 전부 부러뜨렸고 팀 선배인 [[김재박]]에게 빌린 2자루 마저 부러지면서 타격 연습을 못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투수조에 끼어 롱 토스 연습을 하던 차에 미즈타니 코치가 "어깨가 정말 강하다. 잘만 키우면 크게 되겠다" 라고 감탄하며 강력하게 김건우의 투수 전환을 주장하였고, 남은 전지훈련 기간 김건우는 투수로 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6년 시즌 개막 후 데뷔전에서 대뜸 1안타 완봉승을 거두며 김건우는 완전히 투수로 돌아서게 되었다.] 김건우와 [[김동엽(1938)|김동엽]] 감독을 설득하여 김건우를 투수로 전환시켰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86년 시즌 전 야구인들과 야구팬 대부분은 [[OB 베어스]]의 [[박노준]]을 신인왕 후보 0순위로 꼽았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자 신인으로 당당히 MBC 선발진의 한 자리를 차지한 김건우가 [[청보 핀토스]]와의 정규시즌 홈개막전(선발 데뷔전)에서 1안타 완봉승[* 경기 당일 아침 김동엽 감독은 김건우를 불러서는 '''"너 밤새 긴장할까봐 일부러 지금 얘기해 주는 거다. 김건우, 너 오늘 선발이야"''' 라고 갑작스럽게 등판을 통보했다.]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맹활약을 보였다. 반면 박노준은 [[김성근]] 감독이 투타겸업을 시킨다고 했지만 투수도 타자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헤메기만 할 뿐이었고. 친구이자 라이벌인 그 둘의 그해 성적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 김건우 || 37경기, 18승[* 신인 최다승 신기록이었다. 1989년 [[태평양 돌핀스]]의 [[박정현(야구선수)|박정현]]이 19승을 거두면서 이 기록은 깨졌지만, 당시 박정현은 데뷔 해인 1988년 규정된 이닝 수를 못 채우면서 신인왕 자격을 가진 2년차 선수였기 때문에 순수 1년차 신인으로서의 최다승 기록은 계속 김건우가 갖고 있었다. 2006년에 한화 [[류현진]]이 김건우와 타이기록을 수립하였다.] 6패, 평균자책 '''1.81''', 탈삼진 102개 || || 박노준 || 33경기, 5승 6패 7세이브, 평균자책 2.28(투수) [br] 17경기, 타율 0.173, 1타점(타자) || 당연히 그 해 신인왕은 김건우의 차지였다. 다만 플레이오프 진출권 한장을 놓고 후기리그 막판까지 MBC와 OB가 치열한 다툼을 벌인 끝에 시즌 최종일인 [[9월 17일]], OB가 롯데를 극적으로 꺾고[* [[최동원]]의 호투로 9회초 까지 롯데가 3-1로 앞서고 있었으나 9회말 [[김형석(야구)|김형석]]의 극적인 2점 홈런으로 동점을 만들었고, 이어서 [[신경식(야구)|신경식]]이 우중간을 가르는 3루타를 날렸는데 망연자실한 최동원이 커버플레이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3루수 뒤로 송구가 빠지면서 신경식이 그대로 홈까지 파고들어 끝내기 득점을 올렸다. 최동원이 만약 그날 경기를 승리로 장식했다면 [[선동열]]도 이루지 못한 3년 연속 20승 이란 대기록을 세울 상황이었다.] 플레이오프 진출을 결정지었는데 그날 구원승을 거둔 투수는 바로 박노준이었다. 김건우로선 플레이오프에 나설 기회를 놓친 아쉬운 순간이었다. 참고로 김건우와 박노준은 데뷔 첫 해인 1986년 4월 20일,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발 맞대결을 벌였다. 당시 선발투수 예고제가 없었기 때문에 [[일요일]]의 [[잠실야구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양 팀 선발투수가 누구인지 주목하고 있었는데 전광판에 김건우와 박노준의 이름이 뜨자 깜짝 놀라면서 환호성을 올렸다고 한다. 이 날 MBC 선발 김건우는 8이닝 5피안타 1실점으로 OB 타선을 압도하며 승리를 거두었고[* 9회부터는 [[김태원(야구선수)|김태원]]이 1이닝을 잘 막아내고 세이브를 따냈다. 덧붙이자면 김건우는 전날 경기에서도 9회 1사에 등판하여 구원승을 기록했다.] OB 선발 박노준도 8회말까지 완투하며 9피안타 2볼넷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타선 불발로 패전투수가 되면서 눈물을 삼켜야 했다... 이듬해인 1987년, 김건우는 지난 시즌 무리한 탓이었는지 4월 26일 잠실 [[해태 타이거즈]] 전에서 어깨 부상을 당하며 초반에 선발 로테이션을 몇번 거르기도 했지만 복귀한 이후 [[소포모어 징크스|2년생 징크스]]는 없다는 듯 지난 해와 같은 페이스의 쾌투를 보이며 후기리그 중반까지 12승을 거두는 괴력을 보였고, 이번에야말로 MBC가 [[1983년 한국시리즈]] 이후 4년만에 다시 [[가을야구]]에 진출하는 듯 싶었는데... 그해 9월 12일 밤, 김건우는 [[대치동]] 우성아파트 앞에서 여자친구를 집으로 바래다 주려 횡단보도를 건너다 [[뺑소니]] 차량에 치여 양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그 때 여친도 같이 차에 치였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발가락 골절상만 입었는데, 오히려 더 크게 다친 김건우가 땅바닥을 기어오며 괜찮냐고 물었다 한다. 이에 감동을 먹었는지 그 여친은 지금 김건우의 아내로 같이 살고 있다.] MBC가 이 사건의 여파로 지난해에 이어 플레이오프 진출이 무산된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김건우에겐 잔여시즌은 물론이고 선수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 만약 교통사고로 인한 심각한 부상이 없었더라면, 전성기를 구가했던 김건우의 구위를 앞세워 청룡, 혹은 LG가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두었을 가능성이 높았을지도 모른다.] [[파일:김건우_LG.png]] 부상 후 타자로 전향한 시절의 김건우(좌측). 오른쪽은 [[김인식(1953)|김인식]] 코치.[* 청룡의 원년 멤버로 배트콩이란 별명으로 불렸고, 프로야구 초기의 최다 연속경기 출장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현재는 독립 야구단인 [[연천 미라클]]의 대표 겸 감독을 맡고 있다.] 이후 수술과 재활을 거듭하며 약 2년을 보낸 끝에 김건우는 1989년 그라운드로 복귀하였지만 예전에 마운드에서 보여준 위력은 온데간데 없었다. 다만, 그 해 9월 19일 [[태평양 돌핀스]]와의 동대문 홈경기에서 0-0이던 연장 10회말 1사 1, 3루에서 타자로 나와 끝내기 내야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그러나 MBC는 20~21일 경기에서 4-8, 1-2로 패했다). 이후 구단이 매각되며 [[LG 트윈스]]로 바뀐 후 김건우는 결국 1992년 타자로 전향하여 팀의 4번타자를 맡아 시즌 초반 맹타를 날리며 재기에 성공하나 싶더니, 그해 7월 [[빙그레 이글스]] 와의 시합 도중 [[1루수]] [[장종훈]]과 충돌하면서 왼쪽 손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 당하는 불운에 시달렸다. 이듬해인 1993년 시즌 부상에서 복귀하였지만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벤치 신세로 전락하며 그 해를 끝으로 쓸쓸히 유니폼을 벗고 이후 4년간 LG의 2군 투수 코치로 재임하였다. 그렇게 투수코치로 지내던 어느 날 훈련 중 시범삼아 공을 던졌는데 꽤 빠른 구속이 찍혔다고 한다. 2년간의 공백이 휴식이 되었던 것인지 부상 이후 잃어버렸던 구속이 돌아와 있었던 것,. 이에 고무받아 1997년, 최후의 전의를 불태우며 전격적으로 마운드 복귀를 선언했으나, 7경기 등판에 승패없이 평균자책 4.63이란 초라한 기록을 마지막으로 끝내 유니폼을 벗고 말았다.[* 이 경험을 토대로 재 은퇴 직후 책을 내기도 했다.[[https://m.search.naver.com/search.naver?category=&query=%EA%B9%80%EA%B1%B4%EC%9A%B0&range=&sm=mtb_opt&sort=rel&type=0&where=m_book&start=31#api=%3F_lp_type%3Dcm%26col_prs%3Dcsa%26format%3Dtext%26nqx_theme%3D%257B%2B%2522theme%2522%253A%257B%2522main%2522%253A%257B%2522name%2522%253A%2522book_info%2522%252C%2522os%2522%253A81630%252C%2522pkid%2522%253A20000%257D%257D%2B%257D%26query%3D%25EA%25B9%2580%25EA%25B1%25B4%25EC%259A%25B0%26sm%3Digr_brg%26tab%3Dinfo%26tab_prs%3Dcsa%26where%3Dbridge&_lp_type=cm|#]]] 그래도 그 해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었고, 1차전에서 마지막 9회에 패전처리로 등판했다. 현역 통산 투수로서는 '''94경기 등판, 36승 19패 3세이브, 평균자책 2.73'''의 기록을 남겼고 타자 통산 기록은 '''150경기 출장, 117안타, 13홈런, 60타점, 타율 0.255''' 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