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거칠부 (문단 편집) == 생애 == 거칠부지(居七夫智), 김황종(金荒宗)이라고도 한다. 동시대 인물인 [[이사부]]의 예처럼, 다른 이름인 황종의 황(荒)은 당시에나 현대 [[한국어]]에서나 거칠다는 의미고 종(宗)은 부(남자)에 해당하는 말이다. 거칠부의 '거칠'은 고대 한국어를 [[한자]]의 의미에 관계없이 음이 같은 한자들로 쓴 것이다.[* ‘居柒夫或云荒宗’(삼국사기 권44), ‘東萊郡本居柒山郡’(삼국사기 권34)에서는 ‘荒, 萊’를 의미하는 단어가 ‘居柒(중세국어 : 거츨-)’이라 발음되었음을 볼 수 있다.] 즉,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거칠부라는 이름의 의미는 [[울보]], [[먹보]]를 잇는 거칠보.[* 다만 《[[일본서기]]》의 표기를 최대한 살리면 '''구디부레'''로 관형격 어미인 ㄹ이 관찰되지 않는지라 거칠-보다는 겉(고어형: 겇)-이 당대 표기일 수도 있다. 이에 따르면 정확한 이름은 '''겉보'''. 일각에서는 '거칠다'라는 표현 자체도 결국에는 '겉(면이 두드러기처럼) 일다'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거칠다'의 중세 국어형이 '거츨다'인 반면 동시대 '일다[起\]'의 어형은 '닐다'였기 때문에, '겇'과 '닐다'가 합쳐져 '거츨다'가 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도 '거칠다'가 '겉'의 고어형 '겇'에서 파생된 표현일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일본]] 기록에서는 구지포례(久遲布禮) 혹은 구례이사지우내사마리(久禮爾師知于奈師磨里)[* 이사지(爾師知)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이질(爾叱)과 같은 [[이사금]](尼師今)의 이사(尼師)가 아닐까 싶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보검에 새겨진 [[이사지왕]](尒斯智王)의 이사지(尒斯智)도 같은 단어일 가능성이 있다. 尒는 爾의 이체자다. 한편 구례(久禮)는 구지포례(久遲布禮)를 축약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물 마립간]]의 5세손으로 조부는 [[각간]] 잉숙(仍宿), 아버지는 [[이찬]] 물력(勿力)이다.[* 일반적으로 잉숙은 내숙과 동일 인물로 여겨지므로 거칠부는 [[소지 마립간]]의 왕비 선혜부인의 조카가 된다. 《[[삼국사기]]》에 소지 마립간의 왕비인 선혜부인을 내숙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삼국사기》와 달리 소지 마립간의 왕비가 기보갈문왕(期寶葛文王)의 딸이라고 되어 있다. 기보갈문왕은 [[지증왕]]의 아버지이기도 했는데 만약 둘이 동일인이라면 지증왕은 거칠부의 백부가 되는 셈이나 그럴 가능성은 적다. 두 기록에 [[하자]]가 없다면 소지 마립간은 내숙의 딸 선혜부인과 기보갈문왕의 딸을 왕비로 맞은 것인데 당시만 해도 신라에서는 왕이 2명의 왕비를 두지 않았으므로 둘은 선후해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거칠부의 가계는 당시 신라 [[왕실]]의 핵심적인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 물력은 524년(법흥왕 11)에 세워진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탁물력지일길간지(啄勿力智一吉干支)'로 나오는 물력지와 동일한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물력은 울진 봉평리 신라비 외에 다른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조부인 잉숙의 이름은 다른 기록에서 확인할 수 없지만, 486년(소지왕 8) 2월 [[이벌찬]]에 오른 내숙(乃宿)이 잉숙일 것이라고 흔히 추정한다. 잉(仍)과 내(乃)가 비슷한 모양의 한자이기 때문이다. 내숙과 잉숙이 동일 인물이라면, 《삼국사기》에서 소지 마립간의 왕비 선혜부인이 내숙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거칠부의 가계에 대해서도 더 추적해 볼 여지가 생겨난다. 조부가 내숙이라면 증조부는 [[미사흔]]이 된다. 그리고 미사흔계는 지증왕 즉위 이전까지 왕비를 대대로 배출한 왕비족으로 추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왕가]]에서도 꽤나 중요한 집안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지증왕 즉위로 미사흔계의 왕비 배출은 끝이 나버렸기 때문에 이후에는 왕실의 인척으로 내려 앉으며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뭐가 되든 눌지 마립간의 직계가 소지 마립간으로 끝난 상황에서 [[왕위]]를 계승 중인 [[복호(신라)|복호]]계를 제외한 내물계의 나머지 직계인 미사흔계의 직계 자손인 거칠부도 왕실의 주요 일원으로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은 충분해보인다. 소지 마립간의 왕비 선혜부인의 조카설을 따를 경우, 선혜(善兮)라는 이름은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초기 고유 신라식이 아니라 [[불교]]적인 이름이었기에, 거칠부 본인뿐 아니라 집안 전체가 불교에 호의적이고 신라에 수용하고자 하는 입장이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고[*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의 첫머리에 어려서 승려가 되었다고 하고 있다. 신라는 거칠부가 20대이던 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하므로 거칠부는 불교 공인 이전에 승려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승려의 존재 자체는 이전 기록부터 나오므로 [[모순]]은 아니다. 불교는 이차돈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신라 정부의 공인이 527년에 이루어진 것이다. 젊을 적부터 불교에 우호적인 인사였던 거칠부가 불교 수용에 적극적인 [[법흥왕]]과 처음부터 입장을 같이 했고 이후 진흥왕 시대까지 정치적 핵심으로 부상하는 배경으로 보는 설도 있다.] 젊을 적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정확히 언제 출가하고 떠돌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545년 국사 편찬 책임자가 됐을 때 이미 관등이 [[대아찬]]으로 높았기 때문에 이 때 기준으로도 상당히 오래 전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천하]]를 유람하다 신라 국내뿐만 아니라 문득 고구려의 강약을 엿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고구려]]에서 지냈던 적도 있다. 고구려에서 지내던 시절 승려 [[혜량]]의 강연을 들었는데, 얼마 안 돼 혜량법사는 거칠부가 신라 [[귀족]]인 것을 눈치채고 고구려에서 붙잡히기 전에 돌아가라고 조용히 전해 거칠부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이후 신라로 돌아와 [[환속]]하고 신라에서 일했다. 《일본서기》 기록상 529년에 구지포례(久遲布禮)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일반적으로 거칠부의 이름을 다른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서기》 특유의 윤색이 있어 해석이 조금 어렵지만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야]] 왕 [[기능말다간기]][* 가야 전체의 왕이 아니라 가야의 여러 나라 중 한 나라의 왕으로 보고 있다.]가 [[백제]]와 신라를 두려워해 [[왜]]국의 [[오우미노케나|오미노 케누]](近江毛野臣)를 가야 땅에 불러왔고 거칠부가 그에게 사신으로 갔다. 그러나 [[오우미노케나|오미노 케누]]는 급이 낮은 자가 사신으로 왔다고 돌려보냈다. 이후 거칠부 대신 이사부가 3천 신라 군을 끌고 와서 오미노 케누를 쫓아냈다. 진흥왕 때 이사부의 제안으로 [[역사서]]인 《[[국사(신라)|국사]](國史)》[* 보통 명사인지 고유명사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를 편찬했다. 《[[삼국사기]]》에는 545년에 편찬된 것으로 나온다. 거칠부는 어릴 때부터 승려였으므로 [[외국]]에서 들여온 [[불경]]을 읽으려면 [[중국]]식 한문 해독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래서 [[역사]] 시대 내내 특히 고대에는 승려는 [[지식인]] 계층으로 대우받았다.] 당시 신라에서 손꼽히는 [[한문]] 능력을 익혔던 사람인데다, 신라와 고구려 이곳저곳을 유람하면서 각 지방의 명사들과 교류해 학식, 경험, 인맥을 쌓은 인물이므로 이런 일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국사》는 거의 천 년이 지난 [[고려시대]]까지는 존재했으나 아쉽게도 현재는 실전되어 전하지 않으며 고려시대에 기존 사서를 집대성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많은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550년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단양 신라 적성비]]에 거칠부의 이름이 직접 나오지 않지만 [[변태섭]] 교수는 비문의 3번째 줄 맨 위 부분의 이름 부분이 손상된 ▨▨夫智大阿干支(대아찬 ▨▨부)가 거칠부일 것으로 추측했다. 다만 [[주보돈]] 교수는 추정할 근거가 없다고 부정했다. 551년에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 남부의 [[한강]] 유역 10군을 탈취하는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때 참전한 아홉 장수[* 대각간 [[구진]], 각간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거칠부ㆍ[[서력부]](西力夫)ㆍ[[김세종|노부]](奴夫), 대아찬 [[비차부]], 아찬 [[미진부]]] 중 한 명이었다.[* 아직 [[나제동맹]]이 끊어지기 이전이었다.] 진흥왕의 북진 [[정책]]에 따라 고구려를 칠 때 과거 은혜를 입었던 고구려 승려 혜량을 만나자마자 거칠부는 말에서 내려 그에게 군례(軍禮)로 인사를 올리고 신라로 데려와 진흥왕에게 직접 천거해 신라 불교의 승통으로 삼았다. 이후 [[창녕 척경비]], [[황초령 순수비]], [[마운령 순수비]]에서 진흥왕의 행차를 보좌한 인물 목록에서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가야와 [[함경도]] 지역 정복에도 참여하며 맹활약한 것으로 보이는데 예를 들어 가야 정복 완료 1년 전에 만들어진 창녕 척경비에서는 [[갈문왕]], [[대일벌간]] 등 진흥왕을 호위하는 최고위 귀족을 제외하면 가장 먼저 이름이 기재되어 있어 실제 정복 [[전쟁]]에서 전투를 실제로 치르는 자들 중에서는 가장 높은 직책을 보유하였음이 드러난다. 주보돈 교수는 진흥왕 재위 후반부에 창설한 [[화랑]] 제도를 거칠부가 주도해 추진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거칠부 본인이 어릴 적 승려로 출가해 지식을 쌓거나 유명한 승려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적국 고구려 땅까지 포함해 천하를 유람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경험을 쌓은 뒤 조국으로 돌아와 [[인재]]로서 활약하는 생애 전반부 자체가 훗날 화랑의 [[교육]] 과정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마침 화랑 제도를 창설한 진흥왕 말년 시기에 거칠부는 이사부의 뒤를 이어 최고위직에 앉아있었으므로 충분히 [[임금]]에게 이런 정책을 건의하고 추진할 수 있는 위치였기도 하다. 이렇게 신라 상고기 [[전성기]]의 영토 확장이 마무리되고 [[진지왕]]의 치세가 시작된 말년에는 [[상대등]]에 올라 권세를 누렸고 579년 78세에 [[사망]]했는데 시대를 감안하면 상당히 [[장수]]했다. 진지왕이 불과 4년만에 [[정치]]를 돌보지 않아 [[폐위]]되었는데 이 때 상대등이었던 거칠부가 폐위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진지왕 폐위를 주도한 국인(國人) 입장이었거나 진지왕 폐위에 따른 책임을 지고 상대등에서 물러났을 수도 있다.] 그 이상의 자세한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