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가진 (문단 편집) === 조선 외교관으로서 === > 나는 운 좋게 김가진이라는 조선의 거물 정치인과 잘 알고 지냈는데, 실내에서 항상 말총 두건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려주기도 했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재기가 출중했으며, 내가 만난 수많은 훌륭한 외교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를 쩔쩔매게 할 수는 없었다.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보다 더 예리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대응하는 사람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br] > 그는 한때 조선의 사절로 일본 [[막부]](幕府)에 파견되었는데, 매우 짧은 시간에 [[일본어]]를 완벽하게 숙달했다. 그는 [[중국어]]에도 아주 능통했다. 나는 그가 쉽게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그는 공부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아주 짧은 시간에 실제로 며칠 내에 영어를 이해하고 읽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의사소통도 했다. >[br] > 김가진은 다재다능할 뿐만 아니라 대단한 용기와 독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의 측근 대부분의 간사하고 모함을 일삼는 관리들은 종종 그가 왕과 마찰을 일으키도록 유도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머리가 어깨 위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 매우 경이로운 일이라고 익살맞게 얘기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다른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br] > 그는 열렬한 개혁가였고 서구 문명을 극찬했다. 그의 가장 큰 희망은 얘기로만 숱하게 들어 왔던 [[영국]]과 [[미국]]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같은 대화를 나눈 바로 다음 날 아침, 그는 사소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 때문에 왕명으로 가장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 >---- >- 새비지랜도어(Arnold H. Savage-Landor), 《한국 혹은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895[* 신복룡 역,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집문당, 1999] 1846년 2월 24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계 신교(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의 신 안동 김씨 세도가에서 아버지 김응균(金應均, 1801. 1. 6 ~ 1875. 4. 28)의 차남으로 [[https://sillok.history.go.kr/id/kzc_10310007_001|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가 소유한 노비의 수는 150여 명이었는데 이들을 해방해주었다. 그는 문충공 [[김상용]]의 11대손으로 태어났으나 어머니(? ~ 1853)가 첩이었던 탓에 [[서얼]]이었으므로 [[과거]] 응시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1877년, 서얼들에게 허용된 관직인 [[규장각]] 검서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83년, 인천항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신설되자 [[유길준]]과 함께 주사로 임명되었다. 강직한 반청자주의 신념을 가졌기에, [[리훙장]]의 기록에 따르 1884년,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명성황후]]를 알현한 면전에서 “조선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를 배격하여 자주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한다. [[갑신정변]] 이후 적서차별이 철폐되자 41세 되던 1886년 (고종 23) 정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86_014466|급제하여]] [[홍문관]] 수찬(修撰:정6품)이 되었으나, 같은 해 청나라 배격을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다가 적발, [[위안스카이]]의 압력을 받아 [[전라도]] [[남원시|남원도호부]]로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에서 풀려나 청나라 톈진에 잠시 파견되었다가, [[1887년]] 주일공사관이 개설되자 그를 눈여겨 본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특별한 낙점을 받아 초대 주일공사관 참찬관으로 일본행에 올랐다. 초대 공사 [[민영준]]이 국서만 일본에 전달한 뒤 그냥 귀국해버리자, 뒤이어 주일공사가 된 김가진은 공사관 개설부터 모든 외교 업무를 직접 처리하며 사실상 최초의 재외공관 주재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주일 [[청나라|청국]] 공사 리수창(黎庶昌)은 상국 공사에게 와서 부임신고를 하라는 뜻으로 김가진 외교관을 불렀다. 김가진 외교관은 이를 굴욕으로 여겨 안 가고 버티다가 1년만에 청국 공사관을 방문했는데,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김가진 외교관은 4년간 일본에 주재하면서 일본을 통해 서양 산업기계와 과학기술서적을 구해서 조선으로 보내고, 유학생들 뒷바라지에 애썼다. 울릉도에 불법으로 상륙해 나무를 베어가던 일본 목재업자들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기도 했다. 어느 날 청국공사 왕펑짜오(王鳳藻)가 “동양의 독립국은 청국과 일본뿐”이라고 하자, 김가진 외교관은 “조선은 오랜 역사와 사직(社稷)을 가지고 있는 독립국이다. 누가 황탄무계(荒誕無稽)하게 우리를 욕하고 타국에 예속되었다고 하는가?”라며 맞받아치기도 하였다. 1890년 10월, 일본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靑木周藏)가 김가진에게 수 년 전 남대문에 “조선은 청국의 속방(屬邦)”이라는 방문이 걸린 일을 상기시키며, 조선은 반독립국(半獨立國)이 아니냐고 넌지시 물었다. 이때 김가진 외교관은 “조선은 요(堯) 임금 때부터 [[고조선|국가]]와 [[단군|임금]]이 있었다. 설혹 중국에 패하였더라도 이제까지 한 번도 지배받은 적이 없다. 중국과의 사행(使行, 책봉과 조공을 위한 사신행차)은 실익(實益)은 조선이 챙기고 중국은 명분만 가져간다. 조선국왕은 일언일령(一言一令)도 자주(自主)한다.” 하며 [[https://ajunews.com/view/20190123173454788?fbclid=IwAR0XTxka_0NY4PTsB3_-MDMU9LfnOZr9h6q4OgPFsWoJKeCNbajqKp86W90#_enliple|맞서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