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가진 (문단 편집) == 대중매체 == * 1995년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선 배우 [[이낙훈]]이 연기했다. * 1998년 연극 <아!정정화>에서는 배우 이의일이 연기했다. * 대체역사소설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조선의 역사가 변하면서, 그가 가게 될 행보도 변화하게 된다. 조선애국당에서 고종이 속한 당 외의 당에서 선발된 첫 의원이 되었고 고종이 의회에 출석하여 자신의 말에 네 네만 대답하면 의회가 왜 있냐고 분노하자 꿀먹은 벙어리가 된 다른 의원들과 달리 지금 조선이 주변국과 달리 강대국이 된건 모두 전쟁에서 승리하여서 일 뿐 조선이 뛰어난게 아니니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발전을 시켜야한다는 의견을 올린다. 차후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하면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유사해질 듯. 거기다가 딸과 흥영군 [[이우]]가 혼담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혼담이 오간 것이 확실히 이우인지는 불분명하다(이우 밑으로도 [[의친왕]]의 아들이 많다. 공식적인 의친왕의 자녀는 12남 9녀). [[조선귀족]]으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망명한 그는 의친왕과 친분이 있었고, 의친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는 사건에 가담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며느리 정정화는 《녹두꽃》에서 "시아버님은 당시 의친왕과 친근한 사이였으며, [[사돈]]까지 맺기로 약속된 관계였다. 시누이 김영원이 한때 의친왕의 차남과 약혼했던 사이였는데,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혼사가 깨진 것은 어쩌면 [[일본인]]들의 압력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회고하였으며, 그의 손자 김자동의 인터뷰에 따르면 "나라가 망한 후에 [[의친왕]]과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나라 걱정을 하였고 친분이 있었지요. [[의친왕]]의 아들이 많죠. 어떤 아들인지는 모르겠는데 의친왕 아들하고 작은 고모하고 약혼까지 했대요."라고 인터뷰한 내용은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가진(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을 참고. * 대체역사소설인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첩보조직의 수장으로 활약한다. 본인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고, 서자로서의 설움 때문에 러시아의 스파이 노릇을 할 뻔하다가 적발되어 대원군의 수족이 되었던 끝에 그렇게 된 것이다. 대원군 아래의 사조직에 가깝던 공안서에서 활약하다가, 대원군 사후에 공안서가 그대로 정부기관이 되면서 관리까지 된 것. 공안서에서도 거물이다보니 [[블라디미르 레닌]]이 젊을 적에 만나보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대활약한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개화당 지도자중 하나로 독립문 현판을 썼다. 2부부터는 개화당 중진이자 민의원 의장, [[칭제건원]] 당시에는 [[로마]]의 사례를 통해 조선이 명나라의 적통을 이었으니 황제를 칭해도 된다고 주장했다. 김성규(金星圭)와 함께 토지조사사업에 참여하며 실무형관료로 평가된다. 한참 등장없다가 2부 선거때부터 민의원의장으로 다시등장, 청나라를 당장 멸망시키자는 젊은 의원들을 진정시킨다. [[중화민국]] 설립 후 초대 주중공사가 된다. 3부에서는 황태자에게 서예와 외국어를 가르쳤으며 총리가 아님에도 황태자곁에 앉으며 모든 의원들에게 존경받는 살아있는 의회정치의 화신임을 보여준다. [[분류:온건개화파]][[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김홍집 내각]][[분류:1846년 출생]][[분류:1922년 사망]][[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안동 김씨(후)]][[분류:조선귀족 남작]][[분류:서출]][[분류:독립협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