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자헌 (문단 편집) == 생애 == 1562년 [[한성부]] [[성저십리]] [[청파동|청파]]에서 태어났다. [[이정귀]]도 청파 출신이므로, 이정귀와 동향 출신이었다. [[중종(조선)]]대에 [[기묘사화]]로 인해 교살당한 기묘명현 기준(奇遵, 1492~1521)의 증손자이며 [[명종(조선)]]의 교시를 받아 [[심의겸]] 등과 함께 외척 [[이량(조선)|이량]] 일파의 탄핵을 진두지휘했던 가구(可久) 기대항(奇大恒, 1519 ~ 1564)의 손자이다. 1582년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생이 되었다. 1604년 사헌부 대사헌에 발탁되고 거듭 승진해 공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서 [[우의정]]과 [[좌의정]]으로 승진했으며 이 때 소북의 [[류영경]] 등이 [[영창대군]]을 앞세워 [[광해군]]의 즉위를 저지하려 하자 그는 광해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선조(조선)|선조]]가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끝까지 반대하여 광해군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이후 광해군 조정에서 [[정인홍]], [[이이첨]]과 함께 [[북인]]에서 분파한 붕당인 [[대북]]의 영수가 되어 국정을 주도한다. 1617년 [[인목왕후]]의 처우를 놓고 벌어진 폐모론이 일자 반대하였으나 점차 권력을 잠식한 이이첨에게 하극상을 당해(이이첨은 찬성파였다) 문외출송되어 홍원에 유배되고 다시 길주로 옮겨진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김류]], [[이귀]]에게 가담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하였고, 반정이 성공한 후 [[이원익]]의 부름을 받았으나 "옛 주인을 배신할 수 없다"며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인조]]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했으나 물증이 없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하였다. 이원익, 이귀 등의 상소로 인조 5년인 1627년에 복관되었다. 부인 이씨는 [[덕흥대원군]]의 장남이자 선조의 형인 [[하원군]] 이정의 딸이며(즉 선조의 조카사위), 아들로는 [[기준격]],* 기준격은 [[허균]]과 친했으나 기자헌이 폐모론에 반대해 유배되자 허균의 역모 정황을 고변했다. 결국 허균은 처형당했는데 다음 해에 고변을 늦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자신도 [[강릉시|강릉]]에 유배당하였다. 인조반정 후 아버지, 형과 함께 모함을 받아 처형된다.] 기순격, 기신격, 기민격이 있다. 또한 [[기대승]]의 6촌 재종손(친사촌 기대항의 친손자)이 된다. 폐모론 사건으로 인해 허균이 처형당한 뒤 아들 기준격과는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기준격이 스승 허균의 역모를 고변할 때 쓴 상소문이 "[[인목왕후|대비]]를 심하게 침범"하였다 보고 이후 만나려 하지 않았다 한다. [[https://sillok.history.go.kr/id/kob_11011014_00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