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자조선 (문단 편집) == 실존 여부 == [[서한]] 초의 복승(伏勝)이 전한 《[[상서#s-1|상서대전]]》(尙書大傳)에 >"[[은나라]]의 왕족인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조선후로 봉해졌다." 라는 구절이 있으며, [[사마천]]의 《[[사기(역사책)|사기]]》를 비롯한 여러 중국 사서들이 이러한 기술을 따르고 있어서, 전통적으로 [[위만]]에 의해 멸망된 조선왕 준은 이 기자조선의 왕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상서대전》은 [[기원전 3세기]]의 사료로 기원전 11세기의 일을 실증하기에는 너무 늦은 사료라는 점, 한반도 북부 및 중국의 동북 지역에서 [[상나라]](은나라) 문화와 직접적으로 관계있는 유물들이 발견되는 예가 없다는 점[* 중국 청동기는 하북 ~ 요서 선에서 출토 한계가 그친다.]때문에 서양에서 발달한 현대적 사학이 들어온 [[일제강점기]]부터 꾸준히 부정되어 왔으며, 《상서대전》의 기자 관련 기록은 후대의 오류로 이해되고 있다. [[서주]] 시대 초기의 봉건은 '이미 완전하게 영토로 확정된 곳'을 하사받는 것이 아니라 '가서 그 지방을 정복하고 살아라'라는 지시를 받는 개념에 가까웠다. 사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고대국가의 한계로 인해 넓은 지방을 한꺼번에 다스릴 수는 없었고, 이민족의 부족장들도 협상 결과나 아니면 주나라에 알아서 복속되는 개념으로 제후에 오른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제후국의 숫자도 매우 많았다. 《[[한비자]]》에 따르면 [[춘추시대]]의 패자(覇者)인 [[제환공]]은 30개국, [[초장왕]]은 26개국을 병탄했다고 한다. 게다가 '조선' 같은 2자의 국명은 서주 시대의 [[주나라]] 계열 봉건 왕조에게는 쓰이지 않았다. 이는 고대 중국어가 단음절 언어였기 때문이다. 다음절 언어인 한국의 국호에는 1자, 2자, 3자 등 다양한 음절의 국호가 존재했다. 반면 중국은 주로 1자의 국명을 사용했으며, 2자 국명은 '[[중산#s-1]]', '구오'(句吳: 뒷날의 '[[오나라]]')의 사례처럼 중국이 아닌 다른 민족 국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고죽]]처럼 예외도 있었지만 고죽국 역시 변방의 제후국으로 이민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서주시대에 '조선'이 국명일 뿐만 아니라 [[랴오닝 성|랴오닝]] 지역까지 포함하는 지역명이기도 했다고 해석한다면 중국의 기록과 실제 발굴된 유적 사이의 모순은 없는 셈이다. 기자조선이 원래의 조선을 대체했다고 이해하게 된 것은 랴오닝 등의 지역을 서한시대에는 더 이상 조선이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 설명은 서한시대 이전이라고 해도 랴오닝 지역을 조선이라고 불렀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약점이 있다. 《[[위략]]》에는 아예 기자조선의 후예인 기원전 4세기의 고조선이 주나라 희성 왕실을 받들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연나라]]를 치려고 했다는 말이 언급된다. 뿐만 아니라 이때 고조선의 군주는 이전까지 주나라 [[천자]]의 칭호였던 [[왕]]을 자칭했다. '[[연역왕]]이 왕을 칭하자 조선의 통치자도 왕을 칭했다'고 왕을 자칭한 이유까지 풀어서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건 의심의 여지 없이 중국식의 왕칭이 맞다. 이를 생각하면 오히려 중국 사회로의 진출 및 편입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 기자의 계통을 사칭했을 가능성도 제시할 수 있다. 신라 왕실이 [[흉노]] [[김일제]]를 조상이라 주장하거나 고려 왕실이 [[당나라]] [[숙종(당)|숙종]]을 조상이라고 주장한 것처럼[* 고려의 경우 훗날 원나라에서 이걸로 까였다. [[숙종(당)#s-4]] 문서 참조.] 전통시대에는 머나먼 조상이 역사의 유명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례가 흔했기 때문에 이것도 그런 사례라는 것이다. 기자조선의 실존을 믿는 설을 따른다면, 마지막 왕으로 여겨지는 [[준왕]]은 성이 '기'(箕), 이름이 '준'(準), 즉 '기준'(箕準)이 된다. 이들이 찬탈자 [[위만]]에게 밀려 [[위만조선]] 시대 초기에 한반도 남부로 남하해 [[진국(국가)|진국]]을 세웠다고 한다. 이때부터 [[준왕]]은 '한왕'(韓王)이라 칭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한왕은 '[[마한]] 왕'으로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는데, 백제 시조 [[온조왕]]에게 멸망당했다고 한다. 다만 제사는 《[[정사 삼국지]]》 시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여기서 기자는 기 땅의 [[자작(작위)|자작]]이라는 뜻이며, 기자의 본명은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였고, 상나라의 왕족이었기 때문에 상나라의 왕성인 '자'(子)씨를 썼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에 랴오닝성 카줘현(喀左縣)에서 '기'(㠱)라는 명문(銘文) 등이 쓰여진 서주 시기의 청동기들이 대량 출토된 바 있다. 기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문에 기자 일족이 봉해진 곳은 조선이 아닌 요서(遼西: 랴오닝 성 서쪽) 지역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송호정은 [[연(춘추전국시대)|연나라]]의 속국이었던 [[소나라#s-1|소나라]]가 후세에 와전된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한편, 한반도의 [[철기]] 유입이나 [[춘추전국시대]] 전쟁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중원을 떠난 피난민의 이주가 기자조선설로 변형되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물론 기록 자체가 별로 안 남아있는 고대사이기 때문에 수많은 설이 있으며, 이에 대한 내용을 확인하고 싶다면 [[http://ko.wikipedia.org/wiki/기자조선|한국어 위키백과의 기자조선 항목]]을 참고하도록 하자. 이외에 [[중산국]]의 기록과도 관련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