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사단 (문단 편집) === 중세 초기 === 상당수 사람들이 [[중세]] 시대 내내 각국에 국가 기사단이 실존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회·경제적 구조상 불가능했다. 기사의 대부분은 [[군주]]([[황제]], [[국왕]] 등)나 [[영주(중세)|제후 및 그 하위 봉신]]을 섬기는 대가로 자기 [[영지(역사)|영지]]([[장원(농업)|장원]] 및 하위 토지)를 보유하여 평시에는 자기 장원에 매인 [[농노]]의 노동을 감독하면서 [[무술]]을 연마하거나 [[사냥]] 등으로 소일하며 살았으며, 주군의 필요시 소집되어 싸웠으므로, 이들 지방영주로 이루어진 기사단이라는 개념은 불가능했다. 물론 [[성(건축)|귀족이나 왕의 궁정]]에 거주하면서 직접 호위하는 기사도 있었지만, 특별히 이들을 기사단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호위하는 기사들도 일부는 40일 간의 봉건 의무를 수행하고자 궁성으로 와서 일하다가 자기집으로 다시 내려가는 기사, 일부는 하우스홀드 기사(House-hold knight)라 부르는 반영구적 가신이 되는 대신 기사위를 수여받아 [[후스카를|왕실/영주 직영지에서]] [[서전트|숙식하거나]] 직영지 근교 장원을 받은 기사, 또는 아직 장원을 못 받았으나 장차 수여 예정인 기사로 구성된 느슨한 경호대였다. 주군들도 평시 이러한 기사대를 유지하기보다는 실력있는 [[용병]]을 장기 고용하는 쪽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물론 특정 국가에 소속된 기사를 묶어서 그 나라의 기사단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나,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상비군]] 개념의 기사단은 없었다. 그래서 [[배넉번 전투]] 등 그 시대에 관한 문서에서도 표기하듯, 전투에서 봉건기사를 모아 부대로 운용할 때는 “기사단”이 아니라 “기사대”로 표기한다. 의미상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당연한데, 기사단은 평소에도 체계·조직 하에서 함께 활동하는 하나의 집단을 의미하지만, 기사대는 보병대나 궁병대처럼 평소에는 따로 지내던 여러 지역의 봉건기사를 모아서 임시로 부대를 편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사단은 원래부터 하나의 조직이라 자신들만의 명령체계가 있지만, 기사단이 아닌 봉건기사들로 이루어진 기사대는 (대우는 달라도) 각지의 일반 농민들을 모아 보병대를 꾸리는 것처럼, 각지의 붕건기사들을 모아 부대를 꾸린 것이기에 그때마다 지휘체계를 만들어야해서, 기사단과 기사대의 운용법이 상당히 다르다.[* 오늘날로 치면, 기사단은 여단, 사단, 군단 등 정규적이고 상설적인 조직이고, 기사대는 전투단(combat team; combat group)이나 임무부대(taskforce)처럼 필요에 따라 유기적으로 편성했다가 해체할 수 있는 집단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