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사(역사) (문단 편집) == 무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13.postimg.org/1227-23_large.jpg|width=6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4.postimg.org/1254_8.jpg|width=600]]}}} || 일반적으로 기사라 하면 떠오르는 무기는 [[검]]과 [[랜스]]다. 특히 검은 기사의 상징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기사서임할 때나 맹세할 때를 비롯한 의례용품으로도 중요했다. 특히 [[중세]]에 [[그리스도교]]가 정착되면서, [[십자가]]의 형태와 비슷한 디자인의 장검은 상징적으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투를 앞두고 십자가를 대신해 검신에 키스하는 등의 관습은 유럽에서 흔한 일이었다. 기사의 검은 [[롱소드]]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롱소드라는 단어를 한손검으로 생각하는 데에서 나온 잘못된 인식이다. 도검사에서 롱소드는 한손반-양손검을 말하는 것이고, 전통적인 기사의 부무장인 검은 한손검인 [[아밍 소드]]다. 그래서 아밍 소드를 나이틀리 소드(기사검)라고 부르기도 한다. 판금갑옷의 대두로 양손무기가 주력이 되면서 롱소드의 비중이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마상 사용과 지상 사용, 일상의 무장과 전쟁용 무장 모두를 겸할 수 있는 한손검인 아밍 소드와 그 후계 도검은 중세와 르네상스를 통틀어 꾸준히 애용되어 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7adf1d08bb03f358eeaf1c805364a142.jpg|width=600]]}}} || || 마상전투와 갑주검술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13세기 그림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740568b9084e53bec83b1c8fd273c51b.jpg|width=600]]}}} || || 랜스 돌격 이후 롱소드와 런들 대거로 전투를 벌이는 [[트랜지셔널 아머]] 시대의 기병들을 묘사한 14세기 후반 그림 || 검은 중장갑에 비효율적이라 실제 전장에선 [[도끼]]나 [[메이스]] 같은 [[둔기]]가 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일부의 편견이 있지만, 기사의 무장과 전투방식을 묘사한 당대의 군사 관련 기록들이나 유물 연구에서 얻은 자료를 종합한 결과 전장에서도 검의 비중은 컸다. 검은 무게중심이 손잡이 부분에 있어서 다루기가 쉽고[* 도끼나 메이스 같은 둔기는 무게중심이 머리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민첩하게 다루기 힘들었다.], 적은 힘으로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으며, 그에 비해 공격거리 역시 길다. 둔기는 헤드에 무게를 집중시키느라 무게 효율이 좋지 않아서 같은 무게의 검에 비해 리치가 짧다. 또한 칼집과 소드벨트를 이용해 패용하므로 부무장으로 휴대하기도 좋았다. 게다가 검술을 익혔거나 이 기술을 [[방패]]. [[갑옷]]과\ 함께 사용하면 폴암 같은 장병기에 대해서도 충분히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주무장으로도 손색이 없으며, 한손 반 그립을 가진 장은 방패를 버리고 양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기술을 충분히 익히면 거의 모든 상황에서 대처 가능하다는 장점까지 있었다. [[중세 검술]]에서는 맨몸의 상대를 대적하는 평복 검술과 갑옷을 입은 상대를 대적하는 갑주 검술의 기법이 서로 달랐다. 갑주 전투 시에는 칼끝으로 갑옷의 틈새를 찌르거나, [[폼멜]]이나 가드를 망치처럼 휘둘러 둔격으로 쓰러트리거나, 혹은 [[캄프링엔|전투 레슬링]]을 걸어서 쓰러트리고 미저리코드와 [[런들 대거]] 같은 갑옷의 빈 틈을 찌르는 데 특화된 송곳형 단검을 갑옷의 틈새에 쑤셔 넣었다. 이 때문에 당시 기사의 부무장으로 런들 대거 타입의 단검이 널리 쓰였다. 이 시기의 검 역시 그런 용법을 부응하기 위해 뻣뻣하고 뾰족한 찌르기에 적합한 검 형태가 유행했다. 즉, 한국 [[양판소]]처럼 풀 플레이트 입은 기사를 검으로 베거나 '몽둥이 같이 두꺼운 칼날로 갑옷째 뭉개' 죽이는 건 [[https://youtu.be/l47Idc7anG4?t=248|불가능]]했다. 판금갑옷은 양판소 작가나 독자들의 생각보다 굉장히 튼튼하다. 판금 갑옷이 총기의 등장과 함께 사라져 갔다는 건 역으로 그 이하의 파괴력으로 플레이트를 뚫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초기형 [[머스킷]]으로도 잘 뚫리지 않았다. 갑옷 장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갑옷이 총알을 막을 수 있다는 증거로 갑옷에 실제로 총을 쏴서 총알 자국을 남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때도 사기치는 인간들은 있기 마련이라서 일부러 화약을 적게 넣고 쏴 흔적을 남겼던 이들도 있었다.] 실제로도 이 문제로 총기가 나올 때까지 파이크 같은 창류에 속하는 무장들은 철퇴나 플레일 같은 둔기는 물론 할버드, 폴액스 같은 폴암이나 롱소드 같은 도검류들에게 밀려 잘 쓰이지 않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goliath.jpg|width=600]]}}} || || Goliath Fechtbuch (MS Germ.Quart.2020) || 16세기 이베리아인 기사 돈 후안 퀴사다는 백병전에 돌입하면 첫 번째로 [[에스터크]]를 뽑아 들어야 하며, 즉시 적의 약점인 얼굴이나 겨드랑이, 사타구니의 갑옷 연결부를 찌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버렸든 놓쳤든 부러졌든) 에스터크를 잃어버릴 경우 아밍소드를 들고 싸우며, 아밍소드마저 잃어버린 기사는 워해머와 단검으로 싸운다. 기사들끼리 죽이기는 힘들었지만, 기사들에게 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중세 기사들은 사로잡은 다음 몸값을 주고받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기에, 굳이 죽일 필요 없이 무기를 날리고 상대 기사가 전의를 잃을 때까지 적당히 구타 혹은 부상을 입혀 항복을 받은 다음 구속하여 몸값을 받는 걸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고로 몸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평민 병사나 중장병은 무자비하게 죽였다. 때문에 [[맨앳암즈]]로 불리는 중세 중~후기의 중장병들은 무장으로만 보면 기사나 다름없었으며 잡히면 살해당하기에, 보통 기사 이상으로 치열하게 저항하는 일이 빈번했고 기사들은 갑주 입은 상대를 끝장내는 기법을 잘 알아야 했다. 그리고 기사들끼리 서로 죽이지 않는 것도 관례가 그렇다는 것일 뿐, 실제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였다. 격렬한 상황인 전장에서 여유롭게 항복 받을 상황이 그리 쉽게 나오지 않았고, 아래에도 얘기가 나올 기사가 강도로 전업하는 도둑기사나, 산적단으로 변한 프리 컴퍼니 등 예의 차리고 몸값 받아낼 수 없는 상황에서는 무자비하게 죽이는 일이 빈번했다. [[백년전쟁]] 당시 크레시에서도 전황이 극히 불리하다 판단한 [[영국군]]이 포로로 잡은 기사와 귀족을 참살했고, 그 때문에 후대 푸아티에 전투 등에서 부모나 친척을 잃은 [[프랑스]] 기사들이 복수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었다. 중세 후기에 장창대열이 생기고 나서는 [[투핸디드 소드]]([[츠바이헨더]]) 같은 양손으로만 쓸 수 있는 거대한 검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대검은 장창을 쳐내고 파고들기에 좋았다. 물론 이쯤 되면 [피]와 마찬가지로 폴암과 검 사이에 경계선에 있는 수준일 정도의 무기가 되어버린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24-62 (1).jpg|width=600]]}}} || || 카우치드 랜스 자세로 동시에 격돌한 순간을 묘사한 그림 || 마상창으로 잘 알려진 [[랜스]]는 형태상 크게 보병 창이나 별 다름없는 라이트 랜스와, 흔히 기사의 거창 하면 생각나는 둥근 손보호대가 달린 헤비 랜스로 나뉜다. 물론 창의 길이나, 무게추 등으로 다양하게 바리에이션이 있다. 기마 중에 투창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카우치드 랜스가 대세가 된 이후에도 [[스페인]]에서는 기마 투창질이 꽤나 애용됐다. 또한 랜스의 사용법도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하는데, 투창 하듯이 어깨 위에 들고 가다가 내리찍는 방식과, 허리쯤 아래에 한 손으로 들고 찌르는 방식, 양손으로 창을 잡고 휘두르는 방식, 그리고 중세 기사 하면 딱 대표되는 겨드랑이에 끼는 방식이 있었다. 이 방식을 카우치드 랜스 기법이라 한다. 각 기법마다 다양한 장단점이 있으나, 기수가 어지간한 충격을 받아도 낙마하지 않게 해 주는 등자와 전투용 안장, 그리고 창의 리치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카우치드 랜스 기법이 한데 뭉치면 말의 운동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하여 냉병기로서는 어마어마한 공격 거리에서 극대화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므로, 이 콤보가 중세 중기부터 유럽의 대세가 되었다. 중무장한 기사가 밀집대형으로 랜스 차징을 하면 그 자체가 보병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동양에서도 유목민족 기병들이 비슷하게 운용한 기록이 있으며, 말과 말을 쇠사슬로 연결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렇게 연결하는 경우에는 집단 돌격 시의 템포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쇠사슬로 말을 연결하는 것은 한 마리라도 쓰러지면 전체 대형 붕괴라는 결과로 초래되기에 원래는 한 몸인 듯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기병들을 쇠사슬로 연결한 것으로 묘사한 것이 후대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랜스 차징은 대열을 맞추어서 일사불란하게 동시에 들이박는 조직력 중시 방식과, 대충 각개 돌격으로 최고 속력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나뉘는데 두 방식 공히 동서양에 모두 혼재했다. [[십자군 전쟁]] 때 기사들을 상대한 아랍 측의 기록으로는 돌격하는 기사들을 '쏘아진 화살과 같다'라고 평했으며 장창이 등장하기 전까진 정면에서 막는 게 거의 불가능하였다. 기사의 랜스 차징 자체는 매우 강력했지만 랜스는 대부분 1회용이라 차징이 끝나면 부러지거나 해서 재사용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돌격이 끝나면 랜스를 버리고 검이나 보조무기를 꺼내 들고 싸운다. 이러한 기사들의 랜스차징을 막기 위해 [[잉글랜드]]의 궁병들은 말뚝을 들고 다니다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말뚝을 적 방향으로 박아 넣기도 하였고, [[스코틀랜드]]는 기마돌격에 부적합한 험한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하거나, [[윌리엄 월레스]]는 보병대가 [[팔랑크스]]와 흡사한 장창의 벽 쉴트론(schiltron)을 만들어 돌격을 저지하게 하기도 하였다. 특히 장창 전술은 [[중세]] 말에 보병의 기본 전술이 되었다. 그리고 총이 나오면서 장창진으로 보호받는 총병대가 원거리에서 사격을 가하는 파이크 앤 샷 전술이 장창전술의 후계를 잇고, 랜스만으로 안 된다는 것을 느낀 기병들이 이제 권총 들고 마상총질을 하다가, 결국 권총보다 강한 머스킷의 화력에 밀려 중장기병의 시대가 저물고 엽병 같은 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토너먼트]] 경기에서 쓰는 랜스는 끝이 뭉툭하고 더욱 잘 부러지게 개조한 토너먼트 전용 랜스이다. [[기사 윌리엄]] 같은 영화에서 묘사된 토너먼트 경기를 보면 랜스가 스치기만 해도 와자작 부서지는 이유가 그 때문. 이 때문에 토너먼트 경기에서 주인공을 쓰러뜨리려는 악역들은 랜스 끝을 뾰족하게 하고 잘 안 부러지는 재질로 만들기도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398.jpg|width=600]]}}} || 그 외에 지역에 따라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였고, [[폴액스]]나 [[할버드]] 같은 폴암류부터 마상창, 단검, 한손검, 양손검, 도끼, 철퇴, 레슬링, 갑옷, 방패, 기마술 등 사실상 보편적인 무기는 두루 다 다룰 줄 알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격 무기는 잘 사용하지 않았다. 대체로 중세 기사들은 사격 무기를 천시하거나 비겁한 무기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주로 징집된 평민이나 [[용기병]]들이 사격무기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얘기로, 급하면 아무 무기나 쓰게 되어 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 궁술은 이것 하나에만 매진하는 다년간의 단련이 필요한 전문분야이고, [[쇠뇌]]는 그것 자체로도 엄청나게 비싼 전문 무기이기 때문에 전쟁터에서는 전문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유럽]]의 중장기병들은 보통 기마돌격과 근접전을 담당하기 때문에 궁술을 뽐낼 장면은 그다지 없었고, 그런 것은 전문 궁병에게 맡기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기사 중에도 궁술을 아는 자는 드물지 않았을 것이다. 중세의 그림을 보면 [[맨앳암즈]]나 기사가 사격 무기를 사용하는 장면도 곧잘 등장하고, 중세 무술서적에서는 말을 타고 달아나면서 등 뒤로 쇠뇌를 쏘는 [[파르티안 사법]]을 가르치는 장면이 나온다. 게다가 기사들이 평시에 심심하면 하던 스포츠가 [[사냥]]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당장 사냥을 할 때 사용하는 무기가 뭔지를 한번 생각해 보라. 물론 보어스피어 같은 것을 쓰는 경우도 종종 있겠지만 말이다.] 활 다루는 것의 기본기 정도는 하는 기사가 많았을 것이다. 단지, 기사 말고도 활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는데 많은 기회비용을 주고 키워서 근접 전을 담당해야 하는 기사가 궁술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을 따름이다. 전쟁은 상대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가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얼마나 적은 피해를 입는가 역시 중요한데 본인의 역할이 다른 부대의 피해를 감소시키기 위한 근접 전투임에도 전장에서 원거리 무기에 의존하는 방식을 고집한다면 전장에서의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한 즉 권리만 받아 챙기고 의무는 행사하지 않는 비겁자 취급을 받을 여지가 충분하며 따라서 이 때문에 '원거리 무기=비겁자' 인식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말에 타고 돌격하는 중기병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지형 등의 문제로 말 타고 싸우기 힘든 상황이라면 말에서 내려 중보병으로 싸우기도 했다. 또 평야가 많은 프랑스 같은 곳에서는 귀족이나 기사가 순수 보병으로 복무하는 것은 수치지만, 산이 많은 스페인 같은 지역에서는 보병으로 복무하는 것도 별 문제로 여기지 않는 등 환경, 지역적인 차이가 생기기도 했다.[* 복잡한 예로 잉글랜드의 경우 브리튼섬은 평야가 많다고 보기 애매했고 실제로 잉글랜드 기사들도 보병으로서 자주 싸우긴 했지만 그렇다고 절대 순수 보병으로서 복무하진 않았다. 본디 잉글랜드의 기사 자체가 기병의 나라 프랑스로부터 건너온 개념이기도 했고 기사계급이 보통 노르망디 혈통의 앵글로-노르만이었으며 나름 다수의 프랑스 영지를 소유했던 이력이 있어서인지, 백년전쟁 당시 기사들을 보병으로 전환시키는 전술을 매우 자주 사용했음에도 기마전투를 고도로 훈련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