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사(역사) (문단 편집) === 몰락 === 중세 후기인 13세기 이후부터 시작된 중앙집권화로 왕의 사법권과 행정권이 확대되면서, 기사들은 이전까지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다양한 행정직에 임명되어 지방 사법행정의 주역이 되었다. 잉글랜드의 경우 과거의 '중무장 기병'으로서의 기사는 연 5~10 파운드의 수입으로도 충분했으나, '지역 유지이자 왕의 관료이자 전문군인이자 치안 책임자'인 13세기 기사에게는 적어도 연 20~40 파운드가 필요했다. 13세기 초 잉글랜드에서 (각종 행정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는) '기사'의 수는 4,000명에 달했으나, 이러한 '구조 조정'이 진행되면서 13세기 말에는 1,200명 이하로 떨어졌다. 잉글랜드 기사의 2/3가 증발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과거에는 중하층 기사에 속했을 기사들이 더는 기사라고 불리지 않게 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렇듯 기사의 지위가 소수의 부유하고 명예욕 있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 되면서 기사의 숫자는 계속 감소되었다. 군사적으로도 카롤링 제국 시대의 신민소집령이 14세기에 부활하여 잉글랜드나 프랑스 같이 중앙집권화된 국가들의 왕은 이른바 '왕국의 방어를 위한(ad deffensionem regni)' '명백한 필요(necessitas evidens)'가 존재할 때 15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자유민 남성을 징병하거나 전쟁세를 징수할 권리를 얻었으며, 귀족 장교나 중기병 같은 고급 전력도 봉건적인 신서를 요구하지 않는 임시적인 고용계약(indenture 또는 endenture)을 통해 모집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고전적인 기사가 무너진 것은 총화기의 도입 같은 무기의 변화가 아니라 [[봉토]]를 내림으로써 성립되는 [[봉건제]]가 무너진 사회적 변화, 귀족 계급만이 아닌 모든 국민을 징병하는 국민병 제도로의 이행 등 복합적인 사회적 변화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병종으로써 기병은 훨씬 후대인 20세기까지도 계속 활용되었다. 중세에 '기사'라고 부르는 조건인 '영지를 가지고, 주군에게 충성하고, 기사도를 지키고' 같은 요소들이 사회적 변화로 인해 전부 붕괴되면서 기사라고 부를만한 사회적 계층이 소멸했기 때문에 기사가 무너졌다고 표현되는 것이다.[* 전근대 일본의 [[사무라이]]도 마찬가지로 [[폐번치현|영지를 잃고]], 충성할 주군이 사라지고([[교토부|교토]]의 사무라이들은 [[천황]]이 주군이었으므로 제외), [[부시도]]를 못 지키게 되는 사회적 변화로 인해 몰락했다. 그래서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은 기사와 사무라이의 역사에 대해 서로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