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사(역사) (문단 편집) == 환상과 현실 == [[기사도]]의 환상 때문인지 기사들이 [[명예]]를 소중히 하고 자신만의 [[레이디]]를 두는 등 [[낭만]]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 오늘날에는 레이디라는 단어의 관념을 제대로 몰라서 [[연인]] 관계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대의 레이디는 [[로드#s-2]](lord)에 대응하는 단어이며, 귀족 여성으로서 기사의 여주군을 말하는 것이다. 즉, 모시는 존재이다.] 이런 의미의 기사도는 늦어도 12세기 후반에야 정립된 개념이다. 보론 문단 등에서도 언급하지만, 초기 기사 계급의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귀족이 아닌 평민 기사로, 소위 배신(Vavasour) 계층이었다. 가신 밑의 가신이라는 의미인 이 단어는, 그 휘하에 다른 전사 계급을 두지 못한 최하급 전사 계층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기사들은 부유하지 못했지만 농사 따위 농노들이나 하는 천한 일이랍시고 일 따위 안 했다. 이런 인식은 기사들만 가진 건 아니라서 기사가 직접 농사 짓는다 하면 기사들 내에서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별종 취급했다.[* 사실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정치나 군사 이외의 다른 분야의 일을 하는 것을 품위가 떨어진다고 여겼다.] [[흙]] 만지는 게 너무 좋아서 [[토너먼트]]에 나가지도 않고 [[농사]]만 짓는 기사를 보고 레이디가 "그런 남자는 싫어요." 했더니 토너먼트로 나가서 훌륭한 성적을 거둬오더라 하는 옛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영지의 평화나 약자 보호를 위해서 평소에 뭔가 헌신하는 이들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중세의 일화들을 보면 강도나 양아치, 조폭에 가까운 기사들이 수두룩했다. 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지나가던 사람들이나 상인들에게 '수금(?)'을 하는 경우는 흔했고, 이들을 가리키는 '''덤불 기사'''나 '''도적 기사'''라는 용어가 따로 나올 정도였다.[* 19-20세기 자본가들을 뜻하는 영어 [[강도 귀족|Robber Baron]]의 유래 역시 이런 깡패 기사들을 부르던 독일어 Raubritter(Raub 강도 + Ritter 기사)이다.] 지금의 [[독일]]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경우 대공위 시대에 많이 출몰했고, [[영방]]으로 쪼개진 덕에 직접적인 제제를 가할 수단이 부족한 관계로 당시 관세 사무소를 습격하거나 강가의 화물선을 나포하는 등 무법 행위를 자행했다. 괴테의 희곡으로 유명한 실존인물 [[괴츠 폰 베를리힝엔]] 역시 도적 기사였다. 봉건 시대 초기 프랑스 남부는 그야말로 혼돈의 극치였는데, 이런 도적 때 기사들이 자체적으로 성을 쌓거나 이미 있던 성을 점령한 다음 주변 마을들을 멋대로 자기 휘하 영지로 삼는 성주라는 존재들이 난립하기도 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이런 양아치가 대다수인 기사들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고, 프랑스의 몇몇 수도원은 자기네 장원에 속한 기사들에게 '평시에는 무장 금지' 같은 명령을 내리거나 '너무 비싼 무기를 들고 다닌다.'라는 이상한 이유로 처벌하기도 하는 등 교회와 기사는 은근한 갈등 관계였다. 기사도 로망스 따위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기사 따위는 기사들의 행패를 보다 못한 교회와 왕실 등에서 좀 도덕적으로 교화시켜보고자 만든 일종의 [[개]]줄 같은 개념이고, 실제 기사는 훨씬 현실적이고 돈벌이에 민감했다.[[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twar&no=832110|#]] 모시는 주군을 뒤치기한 기사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국왕이나 대영주들은 부하 기사를 신뢰하지 못했다. 물론 모든 기사가 그런 강도 무리는 아니어서, 형편이 극도로 나빠졌지만 [[그리스도교]]적/인간적 양심이 있는 가난한 기사들은 강도짓이라도 불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경제가 나빠지는 경우 영지를 반납하거나 교회에 봉헌하고 [[십자군]]을 떠나거나 [[수도원]] 소속 기사로 들어가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대개 대기근이나 전염병 등이 대유행했을 때 볼 수 있는 모습이고, 노후가 불안정하고 영지가 없는 노기사/병사들도 흔히 택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가난한 기사들은 장가도 못 가고 늙어야 하는 일이 허다했다. 물론 이들도 결혼도 하고 싶고, 후임 기사들이나 부하 기사들도 데리고 다니고, 제대로 된 영지도 거느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기사들은 싸움이라면 환장을 했다. 주군이 소집한 전쟁에 나서면 주군이 봉급도 챙겨주고, 전리품도 얻을 수 있고, 공성에 성공하면 사흘 동안 약탈도 가능했기에 기사들에게 전쟁은 곧 생계였다. 잘 싸우면 주군 눈에 띄어서 더 많은 봉토를 얻을 수도 있고, 그러면 결혼하거나 부하 기사를 거느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사가 [[왕]]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기간은 겨우 1년에 40일 일 정도로 짧았다. 이것은 고전 게르만족의 관습법에서 주군을 위해 종사가 복무해야 하는 날을 '1년에 중에 40밤을 자는 동안'으로 규정해왔던 것에서 유래했다. 물론 전쟁이 FM대로 40일만에 끝낼 수 있는 건 절대 아닌지라 실제 복무 기간은 40일을 넘기는 것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중세에는 이미 40일을 넘겨서 봉사하는 것을 의무로 규정하는 법이 각지에서 제정되었을 정도로 저 고대법은 무시당했다. 물론 그렇다고 저 규정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고, 40일 이상 복무할 경우 [[화폐|돈]]이나 [[땅]]으로 추가 보수를 받았다. 하지만 주군 관점에서는 40일을 넘겨서 계속 봉급을 쳐먹는 기사들을 계속 붙드는 것도 나름 힘겨웠던 관계로, 주군 입장에서도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려 했다. 그래서 기사 입장에서는 일을 조금이라도 더 하기 위해 다른 귀족 눈에 띄어서 그 귀족과 계약을 추가로 맺어서 조금이라도 일을 더 뛰는 투잡, 쓰리잡(?) 기사들도 흔했다. 물론 다른 주군과 계약을 맺으려면 뭔가 커리어가 있어서 명망이 좀 있어야 스카웃이 들어오는 법. 그렇기에 [[토너먼트]]는 기사들이 활동하며 눈에 띌 수 있는 중세판 [[프로듀스 101]](?) 쯤 되는 빅이벤트였다. 토너먼트에 나가서 체면은 세우고 싶지만 괜히 져서 쪽팔리는 건 싫던 왕이나 이름난 귀족들은 승률 높은 기사를 고용해서 호위로 두곤 했다. 이때 이렇게 용병으로 팔려다닌 기사들의 모습에서 따온 단어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프리랜서]](Free Lancer)다. 토너먼트 밀리 경기에서 승자는 패자를 잡고 몸값을 요구하거나 갑옷을 벗겨서 자기가 가질 수 있으니, 가진 게 말 한필과 갑옷에 창검뿐인 가난한 기사는 돈 놓고 돈 먹기 한다는 생각으로 토너먼트에 나가 다른 기사를 털어먹었다. 사실 말과 무기, 갑주의 유지비가 엄청나게 많이 들다 보니 가난한 기사들로선 돈을 벌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밀리 경기는 1 대 1이 아니라 전쟁처럼 꽤 규모가 큰 팀전이라, 아예 이 길로 나섰다가 크게 대성해서 토너먼트 전문 기사단을 꾸린 기사도 있다. 사자심왕을 이긴 사나이로 유명한 [[윌리엄 마셜]]이 대표적인 케이스. 한 일본 [[학습만화]]의 묘사에 따르면,[* [[슈에이샤]](集英社)가 1980년대에 내놓은 시리즈. 국내에서 해적판으로 상당히 많이 나왔다.] [[십자군 전쟁]] 이후 몇몇 타락한 무술실력이 뛰어난 기사는 모시는 주인도 없이 기마창 시합마다 돌아다니며 영주들로부터 [[알바]]를 하며 상금에 눈이 먼 것으로 묘사된다. 영주들은 왕이나 [[주교]] 같은 높은 사람들 앞에서 그 기사가 자기네 가신이라고 뻥치고 다니면서 체면을 유지한다. 최소 12세기까지 유럽이 군소 제후와 귀족들에 의해서 상시적인 내전 상태였던 것에는 이런 기사들의 존재도 한 몫 했다. 기사들의 생계를 유지하려면 어떤 형태나 이유에서든 전쟁이 필요했고, 기사들의 주군인 영주/왕들 역시 기사들 앞에서 위신을 채우기 위해서 전쟁이 필요했다. 한편 저런 극히 가난한 기사들 외에도, 백작, 공작, 심지어 왕까지도 전장터에서는 한 명의 기사였던 중세의 특성상, 전장에 나섰다가 그런 명망 높은 귀족도 한 방에 골로 가는 사례는 무척 흔했다. 심지어 프로방스 백작가나 바르셀로나 백작가의 경우는 기사서임식을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는 징크스 탓에 귀족이면서도 기사 서임식을 최대한 미루는 특이한 가풍도 있었다. 12~13세기를 거치면서 유럽 내부가 좀 평화로워지자 저런 무식한 식충이 강도 기사들의 입지가 점점 줄어든다. 전쟁이 줄어든 유럽에서 저런 하급 기사들이 몰린 곳은 다름 아닌 [[용병]]이었다. 이탈리아의 콘도티에리, 스페인의 콩퀴스타도르를 구성한 인물들을 보면 거의 대다수가 저런 한미한 귀족 출신 가문이었다. 그런데 [[용병]] 문서에서 보다시피 저런 초기 용병들도 결국 평시엔 도적떼가 되어서 약탈을 하고 다니느라 골칫덩어리였다. 한편 군주나 영역제후들도 소집하는 봉신들 대신 용병을 선호하는 경향이 점점 뚜렷해지며, 복무를 대신하는 [[세금]]인 Scutage(영: shield pay, 방패세)가 정착하게 된다. 이전 시대의 관습이었던 '기사는 농사 일을 해서는 안된다.'가 이 시대에 이르러 법으로 확정되는 바람에, 형식적인 기사 타이틀을 단 한미한 귀족들은 군주와 영역제후들이 고용하는 용병으로써 먹고 살았다. 한편 저런 하류 기사들 외에, 중소 귀족으로서 그나마 성공했던 기사들도 나름 다른 길을 찾았다. 이들은 자기 영지와 재산을 굴려서 돈을 벌기 시작했는데, 자신이 거느린 식충이 기사들을 영지에 붙들어 두기보다는 용병으로 내보냈으며, 기사들 중에서도 행정 능력이나 소양이 좀 있는 이들은 미니스테알리(ministeriales)로[* 오늘날 [[장관#s-2]]을 뜻하는 영단어 minister의 어원이기도 하다.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해방농노가 미니스테알리가 되어 귀족 영주나 주교의 행정관이 되는 일이 많았다.] 고용해서 영지의 경영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남작 쯤 되는 이들은 왕에게 관료로 발탁되기도 했다. 이 무렵부터는 분할 상속 경향도 점점 줄어서, 영주들도 장남 미만의 아들들은 용병으로 방출해버리거나 교회로 보내거나 대학에 보내 교육 시켜 관료로 만들곤 했고, 이런 과정을 통해 위에서도 상기했듯 '혈통으로써 기사들'은 꼭 말타고 싸우는 계층이라기보다는 그냥 귀족층이면 으레 붙은 타이틀로 변해갔다.[* 그 결과 역으로 기사 사이에서의 관습이 귀족에게로 흡수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전통적인 기사 양성 방식(페이지-스콰이어-나이트)은 귀족 남성의 교육과정으로 자리잡는 동시에 귀족가문 간 교류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관계가 좋은 주군과 봉신의 가문이 서로 자식을 맡기기도 했고, 긴밀한 관계를 맺은 동격의 가문하고도 피교육자를 교환하고는 했다.] 이 시기 쯤이면 그 전처럼 진짜로 무식한 기사들은 찾기 힘들고, 문학이나 시에 조예 깊은 인물들도 흔히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2~13세기 고명한 기사이자 미네징거인[* 중세 [[독일]]의 궁정을 중심으로 하여 성행한 '미네장(연애시)'을 지은 시인들.] 볼프람 폰 에센바흐는[* 유명한 파르지발이 볼프람의 작품이다.] 작품 내에서 "나는 글도 모르는 야인입니다." 운운하면서 구술로 썼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진짜로 글을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글월 깨나 읽는답시고 시건방지고 콧대높게 굴던 [[학자]]들이나 [[라틴어]]를 포함한 정규 교육을 받은 [[메이저]] [[작가]]들에 대한 빈정거림 내지는 자신은 [[아마추어|아마추어리즘]]에 충실하므로 저런 자들과는 다르다는 의미의 상징적 발언일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볼프람의 글은 작가의 폭넓은 [[지식]]과 [[문학]]적 시도가 있는 만큼 그가 [[문맹]]일 리는 없다. [[라틴어]]를 못해서 [[글]]을 모른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세]] 시대 식자들의 언어는 라틴어였고, 대부분의 책을 라틴어로 썼으며 De Re Militari 같은 군사서도 라틴어로 적혀있다 보니 그걸 못 읽는 군주가 전쟁터에서 글(라틴어)을 아는 기사를 불러다가 해석을 시켜 군략의 조언을 얻곤 했다. 하지만 그 군주도 평상시에 자기네 말로 편지 쓰고 사무 보고 할 거 잘만 했다. 중세의 끝물인 16세기면 슬슬 보병전술과 총병 전술의 발달, 용병으로 대체 추세가 완연해져서 기사가 플레이트 아머 입고서 말타고 돌격할 전장은 없어졌지만, 한미한 수 많은 귀족 가문들이 대대로 이어진 기사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가 끝난지 한창 된 17세기의 소설 [[돈키호테]]의 주인공 돈키호테도 하급귀족 타이틀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상기한 12~13세기 이래로의 변화, 즉 방패세로 봉건 소집을 대체하던 경향을 비롯한 사회적 변화는 이미 진행될대로 진행되어서, 심지어 걸치는 옷과 휘두르는 무기만 바뀌었을 뿐 계속 전장에 나서는 신세였는데도, 아무리 귀족 작위를 단 사람이라 해도 주군을 찾는다면서 떠돌아다닌다 한들 봉토를 내려주고 기사 서임식을 해줄 사람은 없었다. 다만 월급을 줄 고용주를 찾아야 할 시대였던 것이다.[* 무장 면에서는 이미 16세기 즈음 갑옷은 대부분 사라지고 가벼운 [[버프 코트]]나 [[군복]] 등을 입은 채 [[머스킷]] 총과 [[휠락]] [[피스톨]], [[카빈]], [[브로드소드]], [[행어]], [[세이버]] 같은 것을 썼으나, 그걸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다 할 영지도 재산도 없는 하급귀족도 많았다. 그러한 실상을 반영한 대표적 문학작품으로는 [[삼총사]]가 있다.] [[기사단]]도 실존하긴 했지만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달랐다. 중세 유럽에서 기사단의 시작은 [[구호기사단]]이나 [[성전기사단]]처럼 십자군 원정을 위해 만들어진 특별 조직이었고, [[수도회]]에 바탕을 둔 집단이었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기사라는 돈 잡아 먹는 중기병을 부대 단위로 상설 유지하는 일은 필요성도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십자군 시절의 기사단 역시 종교의 적과 싸운다는 대의명분 하에 세워진 경향이 있어서 절대적 필요성 자체는 글쎄올시다 싶은 수준이었는데, 그나마 [[예루살렘 왕국]]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왕국 방위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가치가 있었으나 멸망 후에는 상당히 애매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이들 기사단은 근대까지도 원래 목적에 걸맞게 [[오스만 제국]]이나 [[바르바리 해적]] 등 이슬람 세력과의 싸움을 이어나갔으나, 십자군 이후에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유럽 각국의 국가/사설 기사단은 대개 소수의 자격을 갖춘 기사만이 참여할 수 있는 귀족 클럽에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로, 보통 생각하는 기사 무력 집단으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다만 무슬림 정복 이래 꾸준히 [[무슬림]]과 싸울 필요가 있었던 [[스페인]] 쪽 기사단은 유럽 내에서도 특이한 케이스다. 무슬림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스도교]]라는 구심점을 들기는 했으나, 스페인 기사들은 실제로 자기 땅을 침략한 적과 싸워야 한다는 절실하고도 실질적인 목표가 있었고, 그래서 종교보다는 충성을 바치는 군주를 중심으로 뭉치는 경향이 있었다. 현대에까지 남아 있는 유명 스페인 기사단들의 건립 연혁은 12~13세기까지 올라가고, 하나같이 실제 무력 집단으로서의 가치를 높게 쳤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예루살렘 쪽과는 달리 [[레콩키스타#s-4|목표 달성]]에 성공하였는데, 그 후에는 다른 유럽 지역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기사단도 중세 말로 가면서 귀족 집단화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