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사(역사) (문단 편집) === 보론: 정답이 없다 === 사실 기사(knight) 그 자체가 어떤 문서상에서나 법률상으로 완벽한 정의가 이루어진 적 없는 모호한 통칭이기에 무엇에 중점을 두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기사를 귀족과 동일시 할 수도, 구분할 수도 있다. 즉, '''정답이 없다.''' 이 모든 문제는 그 '기사'가 출현하는 시기의 역사적 배경과 맞물려있다. 사실 기사라는 것의 유래는 조선 시대식으로 비유하자면 '''동네 대감집 네 [[머슴]]'''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원 목차에서도 언급하였듯, 기사라는 뜻의 영어 Knight는 노골적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으며, 원래 머슴이라는 단어에 가깝던 Knight 가 기병을 의미하게 변화한 것도 이러한 이유다. 카롤링거 제국이 분열되고 현지에서 야만족을 알아서 막아야하는 시대가 되자, 시시때때로 빠르게 쳐들어오고 빠지는 [[바이킹]]과 [[마자르족]]에 대응하는데에는 카롤링거 시대의 군제인 자유민 보병보다는 정예 기병대가 유용하였다. 이 정예 기병대의 대다수는 자유민이 아니라 장원을 보유한 현지 유력자의 가신이고, 예속민이었고, [[사병]](私兵)이었다. 프랑크 왕국의 군주들은 그러한 정예 기병대를 가진 현지 유력자들에게 지방관직을 맡겼다. 봉건시대의 관념에서 '''누구를 섬기느냐?'''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다. 비자유민/자유민으로 나눠서 무조건 자유민이 더 높다고 보는 것은 현대적인 관점이고, 비자유민이더라도 누구를 모시느냐, 그 모시는 방법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자유민보다 더 사회적 지위가 높을 수 있었다. 자유민은 이론적으로야 황제나 왕의 신하일수 있지만, 왕은 멀고 영주는 가까웠다. 더군다나 [[백작|영주가 곧 그 지방의 지방관인 경우]]는 너무나 흔했다. 봉건 계약으로 얽히고 섥힌 구조 속에서 가장 고귀한 의무는 군사적 의무였으며, 귀족을 섬긴다는 것은 곧 귀족 사회에 편입된다는 의미였다. 반면 [[농노]]는 자유민에게 부과되는 군사적 의무를 질 수 없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군사적 의무를 하지 못하고 농사만 짓는 것은 곧 치욕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개념 속에서 기사들의 대다수는 원칙상으로는 [[농노]]들과 마찬가지로 비자유민 혹은 반자유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격이 다른 존재로 여겨졌으며, 상위 귀족들 역시 군주 앞에서 기병으로써 종사했기 때문에 기사는 귀족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동시에 [[봉건제]]는 사회의 많은 구조로 확대되었다. 나름대로의 대토지를 가져 스스로 정예 기병으로 무장할 수 있는 자유민은 [[남작]]이 되었으며, 이런 이들 중에서도 [[백작]] 등 작위를 부여받아 합법적 권력을 가지게 된 이들도 있었다. 또 저렇게 권력을 획득한 이들은 주변의 자유민 농민 중에 징집령에 따르지 않는 이들을 [[농노]]로 가신 밑에 강제로 편입 시키기도 했다. 또 자유민 중에서도 이런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계속 홀로서기를 하느니 차라리 유력자의 보호를 받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이들은 스스로 예속민으로 들어가, [[서전트]]나 미니스테리알리스(ministerialis) 등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런 이들 중에서도 또 일부는 유력자의 후원을 받아 말과 갑주와 [[봉토]]를 갖춰 군무에 종사하게 되기도 했다. 또한 봉건제의 확대로, 이전에는 유력자의 집에서 식솔로 살던 사병들에게도 봉토가 따로 주어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솔거 노비들이 외거 노비로 변한 것. 이 시점에 이르러 '잘 무장하고 말 타고 나가 싸우는 사람들'은 '''밀리테스 milites'''라고 불렸는데, 문제는 벌써 12세기면 milites gregarii 와 milites nobiles 라는 구분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라틴어 'gregarius'는 '일반적인, 평범한'을 뜻하고, 'nobiles'는 물론 '고귀한'을 뜻한다. 즉, 프랑크 왕국 시절에 기사의 원형이 등장한 이후, 진정한 의미에서 '기사'들이 등장한 고중세에 이르면 벌써부터 '''평민기사(milites gregarii)'''와 '''귀족기사(milites nobiles)'''를 구분하기 시작했다는 것. 사실 12세기에도 여전히 기사의 상당수는 [[서전트]]나 미니스테리알리스(ministerialis), 혹은 가신에서 유래된 계층이었으나, 기사의 의무가 고귀하다는 관념 덕분에 귀족 계층의 방계들이 꾸준히 기사로써 편입되었고, (비록 그 규모가 매우 작은 경우가 많았으나)귀족적인 특권이라고 간주된 [[봉토]]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았으며, [[서전트]]나 미니스테리알리스 계층 역시 전문직으로써 일하는 계층이 많다보니 사회적 신분이 상승하기 용이했다. 결국 이들은 법적으로 '고귀한 계층'으로 편입되었으며, 조선 시대의 비유를 한번 더 사용하자면 [[중인]]의 신분 상승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12세기에는 사회제도가 심화되고 신분제가 발전하면서, "귀족"이라는 신분제적 질서가 완성되었고, 작위명으로 널리 대표되는 세습적 지위가 탄생하였다. 즉, 이 시점부터 "귀족"이라는 것은 새로이 정립된 세습귀족위를 뜻하게 된 것이다. 상기 '''반론: 기사는 귀족이 맞다'''에 서술된 바와 같이 국가와 지역마다 뒤죽박죽 되는 경향이 바로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중세가 심화되고 귀족 신분제가 정립되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기사였던 이들의 지위가 높아지는 동시에 새로운 기사 계층의 편입을 막기 위한 법이 생겨났다. 하지만 전쟁은 계속 일어났고, [[군인|군무를 이행할 사람들]]은 계속 충당되어야 했다. 더군다나 중세 말부터는 소위 보병 혁명이라고 불리는 군사적 변화가 일어나서 대규모의 보병을 운용할 필요가 생겨났고, 이들이 기사와 동일한 단어인 밀리테스(milites)로 불리는 것은 당대인들에게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말을 타고 싸우는 이들을 뜻하던 단어'인 기사(Knight, Ritter, Chevalier)는 귀족 계층의 신분으로 바뀌었고, 계속 충원되는 비귀족 군인들은 [[맨앳암즈|맨 앳 암즈]]라는 단어로 불리게 된다. 고중세를 지나가면서 15, 16세기에 들어오게 되면 군무와 신분의 분리는 더욱 뚜렷해진다. 11세기에서 12세기 언저리의 제1차 십자군 언저리의 기사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말 타고 싸울 수 있을 것'''"이었다고 한다.[* 출처: Thomas Asbridge, The First Crusade] 여기서 말타고 싸울 수 있는 능력이란 직접 말을 소유했다는 의미이며 예비용까지 최소한 2필 이상이어야 했다. 그래서 이 당시의 기록을 보면 많은 기사들이 전쟁 중 말을 잃고 보병이 되었다는 표현이 보인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사'란 '잘 싸우는 기병'이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당연히 말도 있고 일반적으로는 싸울 수도 있었으므로 기사였던 것이고, 말이 있는 자들을 고용해서 생계를 보장함으로써 휘하에 기사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 당시 기사들은 귀족이거나 그에 준하는 가신들일 수도 있었지만 자기 농장을 가지고 말을 키울 여유도 있는 부농들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보면[* 영주가 전투에 참여한 가신들이나 부농들의 농장을 대신 경작해주는 식이었다.] 반드시 기사가 귀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결국, 정리하자면 '기사의 원형'이 제시된 [[프랑크 왕국]]에서는 정작 '기사'가 아직 없었고, 익숙한 '기사'가 등장하는 시절이 오면, (1) 대중은 잡졸과는 달리 잘 무장하고 싸우는 무사들이면 누구나 다 그냥 '기사'로 여겼고, (2) 기사인 동시에 명백한 세습 귀족이기도 한 체제의 수혜자들은 '우리만이 진정한 기사'라며 군무에 종사하는 평민이나 하급귀족 기사들을 디스했고, 귀족 작위와 기사 직위를 상호불가결의 것으로 묶어놓으려 했으며, (3) 굳이 그런 것 신경 안 쓰는 지방에서는 '진정한 기사든 말든' 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군무와 신분제가 서서히 분리되면서 명백한 통일된 원칙 없이 각자의 이해관계와 명예심, 입장에 따라 귀족과 기사가 같은 것이냐, 아니면 상호 구분되는 것이냐를 알아서 [[설정놀음]] 했던 것. 즉, 무사이자 고귀한 혈통이며 군무에 종사하는 의미로 한정한 좁은 의미에서 '기사'의 수는 매우 적었고, 그 시대는 생각보다 매우 짧았다고 할 수 있으며, 중세가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10세기에서 14세기까지라고 할 수 있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일반 병사나 징집병과는 달리 전문적 군사훈련을 받는 엘리트 전투요원으로서 중장기병이라는 의미에서 '기사'의 수와 그 시대는 좀 더 길었으나, 이 경우에는 '군무'로서 기사지 '고귀한 혈통의 무사'로서 기사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중세유럽의 '''병과 직종'''으로서 '기사'인가, 아니면 중세유럽의 '''사회적 신분'''으로서 '기사'인가, 어느 쪽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상이한 결과가 나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