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쁨조 (문단 편집) == 증언과 증거 == 1970년 초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북한 전역에서 미모를 갖춘 여성을 선발해 김일성 별장에 배치하면서부터 그 원형이 생겨났다고 한다. 김정일은 1974년경부터 자기의 측근들과 비밀파티를 가졌는데, 당 내 주요 자리를 자기 사람들로 채우고 친위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파티를 이용했다고 한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1422021#home|기쁨조 증언]] 기쁨조 안에 행복조, 만족조, 가무조가 있는데, 만족조는 성적으로 만족을 주는 조, 행복조는 안마 등을 해주는 조이다. 이것도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기쁨조를 하다가 퇴직한 사람은 고급 아파트에 들어가게 해준다. 그러나 기쁨조를 나올 때 내부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각서를 쓰게 한다고 한다. 김일성의 경호원을 1년 6개월 정도 했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기쁨조는 1975년도에 처음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인민국 협조단에서 18명 정도를 뽑았는데, 실력보다는 예쁘기만 하면 됐다고 한다. 북한에는 '음팔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사람이 스트립쇼를 하면 김일성이 좋아했다고 한다. 한편,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에게만 안겨주기에는 부러웠는지 예술단에서 예쁜 사람들만 뽑아 김정일 주위를 빙빙 돌게 만들었다고 한다. '''즉, 김일성도 살아있을 때 기쁨조를 신명나게 즐겼다는 이야기이다.''' 김정일은 본처(영숙, 성·나이 미상) 외에 첩 2명과 생활하면서도 주변의 근무여성을 특별양성하여 성적유희로 농락했다. 김정일은 1977년부터 매년 시·도 예술전문학교 졸업반 여학생 가운데 미모의 30여 명을 선발, 평양적십자병원 의대에 1년 과정의 특설 반에서 기본간호교육을 시키고 [[홍콩]]·[[마카오]] 등의 지역에 파견하여 안마술 등 단기간의 연수를 시켜 자신이 최종심사한 여자를 집무실·공관·별장 등에 배치하여 즐겼다. 또 영화배우 유진희 (〈당의 참된 딸〉 주인공)·홍영희(〈꽃 파는 처녀〉의 주인공)·최삼숙·이정순·채수련·오화자·고지미 등 10여 명과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10여 명·전용타자수·담당간호사 등 숱한 여자들과 성적유희를 자행했다. 김정일은 이들에게 공훈 배우 칭호를 수여하고 고급물품을 선물했다. 김정일은 '''변태적인''' 기질이 다분했는데, 주말마다 각종 연회를 열고 무용수들에게는 [[나체]]로 춤을 추게 하며 참석자(중앙당 부부장급 이상)로 하여금 이들을 [[애무]]하도록 한 뒤 즐기는 등 변태적 음란 기질자임을 잘 보여준다. [[월간조선]]의 보도에 따르면 "실제로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김정일은 최소한 10명의 [[사생아]]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며, "러시아 [[타블로이드]] 일간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Комсомольская правда)는 1997년 9월 23일 이런 사실을 폭로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해당 일간지의 친북 논조를 생각해보면, 해당 기사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 독립적인 출처로부터 검증되지 않았다. 조선계 출처(조선일보, 월간조선)의 성격상 북한 관련으로 많이 언급되는 외신과 북한 관련 내용을 억지로 엮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월간조선은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가 '수령과의 잠자리'라는 제호 아래, 기쁨조를 비롯한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여성 편력을 거의 전면에 걸쳐 소개했다고 주장하였다. "김정일에게 수많은 [[사생아]]가 있으며, 확인된 아이만 하더라도 10명 정도."라고 덧붙였다고도 주장했다. 외교관 출신 탈북자인 [[고영환]]에 따르면 김정일이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에게 기쁨조 공연을 보여준적 있는데 시아누크는 공연을 본 후 매우 불쾌해 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