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미독립선언서 (문단 편집) == 개요 ==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한국(조선)의 독립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작성된 장문의 선언서. 3.1독립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라고도 한다. [[민족대표 33인]]의 공동명의로 발표되었으며, 초안을 쓴 사람은 [[최남선]],[* 이 사람은 민족대표 33인이 아니고 나중에는 친일파로 변절한다. 최남선이가 쓴 최초 원문을 위창 오세창 선생이 보고는 요즘 젊은 것들은 글도 제대로 못쓴다고(한문 실력이 형편없다는 뜻) 야단 맞았다는 일화가 있다.] 대원칙을 세운 사람은 [[손병희]]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손병희 본인은 경찰에 연행되어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나는 한일합병에 대하여 별로 찬성이라든가 불찬성도 하지 않았다."라고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여, 과연 조선 독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에 있는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출처: 손병희에 대한 경성지법 조서, 4월 10일자.] 손병희가 독립선언서를 고쳐 쓰려고 했으나 시일이 얼마 안 남아 대원칙만 썼다고 한다. 처음에는 여러 단체에서 서로 자기 단체의 이름을 먼저 올리겠다고 격렬히 싸우자, [[기독교]]계통으로 참여한 [[이승훈(1864)|이승훈]]의 훈계로 결국 연장자이자 주최자인 손병희가 대표로 첫 번째로 실렸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의 주장으로 뒷부분에 '공약 3장'이 추가되었다. 당초에는 대중이 모일 [[탑골공원]]에서 발표하려고 했으나,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태화관(泰和館)이라고 하는 요릿집[* 당대 가장 유명한 기생집 명월관의 분점. 자세한 것은 [[요릿집]] 문서의 태화관 부분 참고.]으로 장소를 바꿔 조용히 선언식을 진행했다. 또한 민족대표 33인은 선언문을 낭독한 즉시 [[일본제국 경찰|경찰]]에 자수하고 순순히 연행되었다. 그 덕분에 탑골공원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은 머뭇거리다가, 민족대표 33인의 선언식과는 별도로 선언식을 진행하고 만세운동을 개시했다. 민족대표 33인은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손병희 등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도 있고, 이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한 사람도 많다. 당시 옥고를 치르는 것과 현재 교도소 생활하는 것은 처우가 천지 차이이기에 옥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시대 수감자의 처우는 현대와 비교하면 열악했고, 일종의 반체제 사범인 독립운동가로써 잡혀간 이들에 대한 처우는 더 열악했다. 독립운동으로 잡혀간 이들의 끼니는 겨와 모래가 잔뜩 섞인 가축여물같은 밥에 소금국이 전부였다. 이마저도 식민지 당국이 정한 수감자의 등급에 따라 조립식 그릇의 받침을 높이는 식으로 밥의 양을 더욱 줄여 배급했다. 일제는 냉난방은 고사하고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등을 모두 수감자를 괴롭히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또한 다른 주도자들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수감자들을 고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