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묘사화 (문단 편집) == 후일담 == 중종은 당시 승지들도 모르게 입궐명령을 내렸고, 남곤, 심정 등은 경복궁의 북쪽에 있는 [[경복궁 신무문|신무문]]으로 들어와 승지들 모르게 회의를 열었다. 그래서 기묘사화를 북문지화(北門之禍)라고도 부른다. 갑자기 소집된 조정 회의에 놀란 조광조 등 사림파는 부랴부랴 경복궁으로 들어왔지만 회의는 이미 끝난 뒤였고 곧바로 체포되었다. 어리둥절했던 조광조는 감옥 안에서 배신감을 가져서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고 한다. 죄인이 어떻게 감옥에서 술을 구했나 싶을 텐데, 조선시대의 감옥은 사식이 없으면 수감자가 굶어 죽을 만큼 거의 식사를 챙겨주지 않았다. 대신 감옥 밖에 있는 가족들이 수감자 먹을 음식을 챙겨주게 하였다. 이는 역으로 생각하면 잘 살던 사람이 감옥에 들어갔더라도 다른 가족만 멀쩡하다면 그만큼 사식이 잘 들어갈 수 있었다는 뜻도 된다. --그래도 술은 너무했다.-- 다음 날 취조를 위해 간수들이 조광조를 끌어냈을 때는 이미 너무 취해서 심문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여기서 만취한 나머지 조광조는 심문관이었던 병조판서 [[이장곤]]에게 술주정을 했는데 '''"희강(이장곤의 자)아!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못난이 같으니라구!"'''라는 반말도 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었다. 결국 이게 조광조를 죽음으로 모는데 중요한 명분 중 하나를 제공했다. 중종은 대신들 거의 전부가 조광조의 사형을 반대하는 와중에 "국문장에서 한 짓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하며 사형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남곤이 이를 필사적으로 막으면서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습니다."라고 술에 취해서 벌인 실수라 죽이는 것은 심하다며 반박했기에 사형을 언급하지 못하고 결국 유배로 끝이 났었다.[* 중종은 죽여야 하는 이유를 계속 강조하나 남곤이 그 때마다 막아서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선 유배를 보낸 후에 죽여야 했다. 이 때 중종의 위협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감안하면 남곤과 정광필은 다른 것은 몰라도 조광조의 사형을 막으려고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 셈인데, 중종에게 옳은 말을 하는 정광필마저도 중종이 위훈삭제를 취소하라고 계속 압력을 놓자 결국에 굴복해야 했을 지경이었다. 당장 중종의 친위쿠데타로 인한 군대에 의해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었으니.] 앞에서 말했다시피 남곤과 정광필의 만류로 조광조는 능성으로 귀양 당했지만 한 달도 못 돼 바로 사사당했다. 이 외에 김정, 기준, 한충, 김식 등 수십 명도 역시 유배됐다. 현랑과는 없어졌고 공신에서 삭탈된 훈구파들은 모두 복훈되어 빼앗긴 재산을 모두 되찾았다. 후일 이때 희생된 사람들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불렀다. 다만 조선 당대에도 비판이 있어서 율곡 [[이이(조선)|이이]]는 16세기 후반에 쓴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가 성급했다고 비판했고, 퇴계 [[이황]] 또한 조광조를 두고 공부가 부족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대체로 조광조가 너무 과격하게 이상 정치를 추구했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조광조의 개혁에 긍정적인 부분도 있기는 하다. 한전론과 노비 종모법을 중심으로 연산군 이후 심각한 사회 문제였던 국역의 이완, 지배층의 모랄해저드와 토지 잠식, 양소천다 현상을 해결하려 했고 훈구와의 격렬한 충돌 끝에 절충론이라 할 수 있는 급양자 3자 첨입까진 이끌어 낸다. 이 시기 조선 인구의 50%가 노비였다. 국가가 내부에서 완전히 곪아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선조 대에 집권한 후대 사림들 중에 이 정도로 적극적인 개혁을 주장한 사람이 없다. 제대로 언급이나 관련된 개혁 논의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치부에만 열을 올렸다. 사림, 특히 서인을 중심으로 개혁론이 제기되고 사족들이 동감하게 된 건 임진왜란이란 초유의 국난 이후다. 개혁 안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걸 절실히 깨닫고 나서야 움직였다. 허나 조광조도 그 일파도 사실 민생문제나 부국강병보다는 자신들의 성리학적 이념 실현에 더 맹목적으로 매달려 있었기에 맞는 얘기는 아니다. 즉 조광조에 대한 비판론자들이 수구반동이라기보다는 자기네들 눈에 보기에도 조광조가 너무 맹목적이라 공부가 부족하다고 평한 것일 수 있다. 실제로도 세종대왕, 성종대왕이라도 잘못했습니다란 돌직구는 시대관을 감안하면 망언급이다. 또한 현량과를 통해서 코드인사라는 무능한 자기 일파로만 가득 채운 후 자신들에게 반대하면 무조건 소인으로 몰아붙이는 태도를 비롯해 시와 문장을 모두 없애버려야 한다는 망언과 속고내 토벌 반대를 하면서 보인 망언 등은 옹호의 여지가 없고, 조광조를 신격화시킨 사림들도 해당 부분의 언급을 하지 않을 정도. [[선조(조선)|선조]] 1년에 조광조는 신원되었으며, 문묘에 배향되고 [[영의정]]으로 추증되는 등 명예가 회복되었다. 하지만 주범이자 선왕인 중종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왕조 국가에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주초위왕' 날조설이 공식화되고 모든 책임은 남곤과 심정에게 돌아갔다. 참고로 이때 [[이순신]]의 조부인 이백록도 기묘사화에 휘말려 처벌을 받았다. 단,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처럼 사약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고, 그냥 벼슬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물러났다가 나중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벼슬 생활을 한다. 그러니 이순신더러 [[역적]]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엄연히 틀린 말. 게다가 이순신이 벼슬 생활을 시작한 선조 시대에는 여론이 공식적으로 완전히 뒤집혔다. 물론 사림들에게는 더욱 오래 전부터 기묘사화가 부당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상이 기묘사화 때 해를 입었다.'고 하면 [[역적]]의 자손이라 하여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 만한 일이었다. 당장 [[인조]] 때 명신 [[김육]]만 해도 증조부가 조광조 때 같이 피해를 입은 [[김식]]이었다. 김육의 가문은 [[송시열]]과 대대로 대립하며 [[김석주]]까지 번영을 누렸으나 후반기에는 송시열과 다시 손을 잡았다. 한편 이 사화는 훗날 [[이이(조선)|이이]]와 [[이준경]]이 대립하는 한 가지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이는 [[을사사화]](1545) 공신들의 위훈을 삭제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반면, 이준경은 함부로 시도해선 안 된다고 비판하였다. 이준경은 바로 조광조의 제자였고, 그 조광조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똑똑히 보았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