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묘사화 (문단 편집) == 중종의 의중 == 중종이 기묘사화의 주역이라는 점은 이처럼 확실하지만 '중종이 왜?'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중종이 [[회고록]]을 남긴 것도 아니고[* 조선 역대 국왕들의 일기인 [[일성록]]이 편찬되는 건 정조 대부터다. 설령 당시에 일기를 적었더라도 기묘사화 같은 파장이 어마어마했던 사건을 기록하면서, 중종 본인이 거기에 자신의 의중을 정확히 기록했을지는 의문이지만.] 중종 본인이 당시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으므로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후대에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한다. 1차적으로 꼽히는 원인은 우선 조광조가 왕권과 조선 왕실에 대한 도전 행위를 보였다는 점이다. 사실 중종 치세 초기는 아무리 [[폭군]]인 연산군을 몰아내기 위해 일어섰다고는 해도 반정은 반정이라 정통성이 매우 약했다. 거기에 운도 없이 중종 치세때 재난이 매우 잦았다. 종묘에 벼락만 2번 떨어졌고, 성저십리쪽인 지금의 성북구에서 진도 6.7의 지진이 일어나 전국이 흔들리고, 가뭄, 가을장마, 태풍, 해일 등의 자연재해가 한해 몰아서 일어나고, 전염병도 돌았다. 이러니 가뜩이나 약했던 왕권이 더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일례로, 중종과 조광조는 당시 조선 왕실에서 전통적으로 존중해왔던 [[도교]]풍 제사기관인 [[소격서]] 철폐를 놓고 격심한 의견 대립을 보인 적이 있다. 이때 조광조는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에 두고 강경하게 폐지를 요구했다. 수차례 폐지 논의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 [[성종(조선)|성종]] 같은 역대 왕들이 지켰던 소격서가 중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없어지게 되자 중종은 체면이 깎이게 되었다. 결국 완고하고 타협을 모르는 조광조의 행동을 중종은 점점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계속해서 왕권을 위협하고 신하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는 태도에 슬슬 화도 났을 것이다. >[[홍문관]]에 전교하기를, "소격서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아조(我朝)의 세종과 성종께서 태평의 정치를 이룬 것은 본디 우연한 것이 아닌데도 오히려 혁파하지 않으셨으며, 이는 지금 창설한 것이 아니니 혁파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 >하매, 조광조 등이 재차 아뢰기를, > >"가령 세종·성종께서 대성(大聖)이라 하더라도 이 소격서를 혁파하지 않으신 것은 큰 잘못입니다. 지금 만약 세종·성종께서 혁파하지 않으신 것이라 하여 끝내 혁파하지 못하시면, 뒤를 잇는 자손도 반드시 성상을 핑계하여 말할 것이니, 유행하는 폐단이 오늘날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하였다. >---- >《[[중종실록]]》, 중종 13년(1518) 8월 28일 4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ka_11308028_004|#]] 실제로 실록 기사에 따르면 조광조는 점점 선을 넘는 발언을 일삼고, 조선 왕조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이전 왕의 행동을 신하 입장에서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발언'''까지 했다. 중종은 폐지를 요구하는 조광조에게 "세종께서도 소격서를 철폐하지 않았다." 하며 반론하자 조광조는 대뜸 '''"세종대왕의 유일한 오점이 바로 소격서를 남긴 것."'''이라고 받아쳤다. 선대 왕의 오점 운운하는 이 발언은 지금 봐도 상당히 무례한 말인데, 당시 시대에서 사안에 따라서는 역도로 몰리기에도 충분한 언행이었다.[* 조선은 엄연히 왕권을 가장 중요시하는 [[전제군주제]] 국가였는지라, 신하의 공로는 왕의 공로가 되고, 왕의 과오는 신하의 과오로 치부했을 정도였다.] 선왕에 대한 평가는 설령 지금 왕이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지라 조선 역사를 보면 선왕의 결정을 뒤엎지 못하거나 뒤엎어도 실제 생각은 달랐을 것이라느니 신하가 멋대로 저지른 일이라느니 하면서 우회적으로 건드렸을 정도이다.[* 당장 [[무오사화]]가 왜 일어났는지부터 생각하자. 연산군은 [[조의제문]]으로 인해 '''세조는 왕위 찬탈자이자 정통성이 없는 왕이라고 오명을 씌웠다는 식으로 연결'''해서 삼사를 숙청했다. 또한, 몇천 년 전 중국 [[서진|진나라]] 시기에 '''[[번건]]이 당시 황제인 [[사마염|진무제]]에게 [[등애]]의 사면을 건의한 것'''이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고 [[촉한]]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왜 나왔겠는가? 그를 사면하는 순간 선대 황제이자 아버지인 [[사마소|진문제]]가 그를 평상시에 위험한 존재로 눈여겨 보고 있다가 [[종회]]의 반란을 구실 삼아 죽였다는 점을 자식인 [[사마염|진무제]]가 시인하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잘 보면 알겠지만 조광조 본인의 몰락도 이런 식으로 윤색되었다. 기묘사화는 중종이 주도적으로 나선 숙청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남곤과 심정이 저지른 것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조광조의 행동은 전제 왕권 체제에서 용납될 수 없었고, 면전에서 자신의 [[조선 세종|고조부]]에 대한 지적을 들은 중종도 그 앙금을 오래도록 기억에 새겨둘 만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세종은 당대나 현재나 조선 역사에서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사람인데 '''유일한 오점이''' 어쩌고 하는 것 자체는 왕 입장에서는 더욱 꺼림찍할 수 있었다. 즉, 이런 식으로 조광조 일파가 점차 '선을 넘는 발언'을 하면서 왕권을 위협하는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에 숙청하기로 가닥을 잡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또한 이 소격서 혁파 사건 전에도, 조정이 '조광조 일파'로 채워지기 시작하자 기막힌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조광조 세력 신하들이 근래에 나라가 바로잡혀가고 있다며 '''이게 다 조광조 덕이다'''라고 발언한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이 역시도 문제인 것이 전제군주제 하의 국가에서는 정말 왕이 쉴드 불가능한 실책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왕의 실책은 신하의 실책이 되고 신하의 공적은 왕의 공적이 된다. 그런데 저 발언은 '''중종 면전에서 나온 말이다''' 물론 조광조의 정책은 조광조에게서 나온 것이니 실제로는 그의 공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왕 앞에서 조광조 덕이에요(=당신 덕이 아니다) 라고 하는것에 중종의 기분이 어땠을까?'''[*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후세 사람이 보기에도 군주의 권위가 외형상으로도 짓뭉개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왕조 말기, 그것도 에나 보이는 현상이다. 예시를 들어 조조가 동귀인과 복황후를 죽인 일, 고징이 효정제에게 "건배하시지요" 라는 말을 한 일 등에서 당시의 군주인 헌제와 효정제 모두 각각 후한과 동위의 마지막 군주였다. 물론 조광조 일파가 중종을 무시한건 아니다만 다른 신하들이 다른 신하의 공업을 군주의 공업이라 하지 않고 해당 신하의 공업이라 하는 것에 중종의 기분은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이외에도 기묘사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위훈삭제 사건에서 조광조 일파가 주장했던 삭제 명단에는 [[종친]]들도 많이 있었기에 왕가의 지지 세력이 흔들리게 되자 중종이 위기감을 느꼈다는 분석도 있다. 어느 방향이든 왕권에 위협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물론 당대의 위훈삭제 사건이 나름 정당한 행동이긴 했다. 위훈의 수가 너무 많고 반정공신들 중엔 엉뚱한 사람들도 많이 껴서 논란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 위훈삭제는 이미 중종 초의 대간들도 주창했던 일이며 실제로도 일부가 개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판에서는 정당하고 부당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종 입장에서 그들이야말로 임금인 자신에게 가장 든든한 친위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종반정]]을 기획, 실행하여 중종 정권을 출범시켰고 최고의 권세를 누렸던 [[박원종|3]][[유순정|대]][[성희안|장]]은 이미 사망한 뒤라, 남은 공신들은 정말 중종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을 모조리 삭제하자는 주장은 중종 입장에서는 위협으로 느낄 소지가 충분하다.[* 특히나 중종은 공신 문제로 초기에 여러차례 사건사고를 겪었다. 김공저의 옥사 당시 김공저가 공신이 못 되어 불만을 품은 이들이 많으니 우려스럽다고 말한 게 드러났고 이과의 옥사는 아예 자기가 공신이 못 되었다고 역모를 꾀하다가 걸린 일이다. '''심지어 거기에는 반정에 참여하고도 대우받지 못한 무관, 종친이 다수 있었다.''' 그나마 이건 양반이다. 그 뒤에 벌어진 신복의의 옥사는 '''개정당한 무관, 종친 출신 공신들'''이 역모성 발언을 주고받다가 생긴 일이다. 즉, 중종은 이미 공신 책봉, 개정 문제로 초기에 여러 난제들을 충분히 겪었다. 그런데 위훈삭제 대상자는 1등에서 4등까지 숫자도 전체 100여명 중 70여명에 달했다. 이러니 중종은 경악할 수 밖에... 그나마도 처음에 대신들이 주창한대로 4등 중에서 (심지어 이 4등은 대상자가 50여명에 달했다.) 문제 있는 사람만 추려내는 것이면 모르겠지만 (중종도 여기까지는 타협의 여지가 있었는지 별 문제없이 받아들였다) 그것도 아니니...] 나름 개혁파라고 생각해서 힘을 몰아줬지만, 그게 제대로된 개혁이라기보다는 사림끼리 정계 인맥을 형성하고 [[코드인사]]로 점철된 '우리끼리' 정치를 보여줬기 때문에 중종이 실망해서 숙청을 결심했다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 조광조가 실각한 이후 조광조 및 그 일파가 저지른 [[현량과]]의 폐단이 온갖 곳에서 고발되어 나온다. 주된 고발 내용은 급에 맞지 않고 실력이 부족한 인사를 단지 사림 조광조 일파라는 이유만으로 두루 요직에 앉혔다는 것. >현량과(賢良科)는 부득이 혁파해야 합니다. 당초에 듣건대, 김식(金湜)은 급제한 자가 아니건만 저들이 다 끌어들여서 경연관(經筵官) 또는 대사성(大司成)이 되게 하고자 하였으나 조종의 법이 아니므로 현량과라는 명목으로 저희가 아는 자들만을 뽑아서 시험하되 그 사람들의 이름 밑에 ‘경제(經濟)가 유여(裕餘)하다.’ 느니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다.’ 느니 주를 달았다 합니다. 대저 경제가 유여하다는 것은 능히 성인 지위에 도달한 자라야 그런 것입니다. 널리 베풀어서 뭇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요(堯)·순(舜)일지라도 잘할 수 없는 것인데, 이런 사람을 경제가 유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학문에 연원이 있는 것도 성인 지위인 사람입니다. 공자(孔子)의 제자 중에서 오직 안자(顔子)한 사람이 이에 해당하고 자유(子游)·자하(子夏)일지라도 잘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저런 자가 잘할 수 있겠습니까?[* 쉽게 말해 능력보다 훨씬 후하게 평가를 주면서 자기 일파 사람을 일부러 요직에 앉혔다는 뜻이다.] 이것은 다 임금을 속인 것이며 그 나머지도 이와 같습니다. 임금께서 능히 깨달으시면 쾌히 결단하여 혁파해야 하고 이렇게 유난하셔서는 안 됩니다. >---- >《[[중종실록]]》, 중종 14년(1519) 12월 14일 2번째 기사[[https://sillok.history.go.kr/id/kka_11412014_002|#]] 이러한 고발이 사화 이후에 터져나온 것은 '''조광조 일파가 죄다 실각했기 때문'''에 뒤이어 나온 것이지 인사 비리 자체는 이전부터 계속 암암리에 문제제기되었을 확률이 높다. 당연히 중종 귀에도 들어갔을테니 조광조에게 크게 실망하여 결국 숙청으로 가닥을 잡지 않았겠냐는 것. 그전까지는 문제제기가 거의 되지 않았는데 이는 당연하다. 조정의 요직들이 죄다 조광조 일파 손아귀에 들어갔으니 제기를 할래도 할수가 없었던 것. 괜히 중종이 기묘사화를 일으키면서 숙정문으로 몰래 훈구파들을 입궐시키고 조광조 일파 모르게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게 아니다. >조광조·김정·김식·김구·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 등이 서로 붕비(朋比)가 되어 자기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로 서로 의지하고 권세있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서 후진을 이끌어 궤격(詭激)이 버릇되게 하여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朝政)이 날로 글러가게 하였으나, 조정에 있는 신하가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크다. 왕법(王法)으로 논하면 본디 안율(按律)하여 죄를 다스려야 하겠으나, 특별히 말감(末減)하며 혹 안치(安置)하거나 부처(付處)한다. 대저 죄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는데 벌은 경중이 없이 한 과조(科條)로 죄주는 것은 법에 어그러지므로 대신들과 경중을 상의하여 '''조광조는 사사(賜死)하고''' 김정·김식·김구는 절도(絶島)에 안치하고 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은 극변(極邊)에 안치하라. >---- >《[[중종실록]]》, 중종 14년(1519) 12월 16일 2번째 기사[[https://sillok.history.go.kr/id/kka_11412016_002|#]] 실제로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 중종의 전교를 보면 중종이 지목한 조광조의 핵심 죄목은 자신들끼리 편을 만들어 싸고 돌았고, 자기 사람들만 천거하는 코드인사를 행했으며 '''[[국정농단|국론이 뒤집히고 조정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내린다. 중종이 생각한 조광조 숙청 사유야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전교에는 아무래도 생각하기에 가장 큰 핵심적인 죄목을 대표로 언급했을테니 이게 숙청을 결심한 결정적인 사유일 확률이 높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중종이 [[연산군|형]]의 [[중종반정|폐위 과정]]을 눈으로 목격하였고, 자신에게 주어진 왕좌를 신권의 지나친 비대화로부터 지키기 위해 왕권에 위협되는 조광조와 그 이상의 권력을 갖는 권신 [[김안로]]의 숙청을 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처럼 여러 가지 추측이 설왕설래하지만, 중종이 실제로 어떤 의도로 숙청을 밀어붙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설명했다시피 중종이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중종의 생각은 위의 추측 중 하나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았을 확률이 높고, 어쩌면 위에서 언급한 사유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숙청을 결심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중종이 조정 중신들의 수차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결정을 관철하여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고, 심야에 미리 친위 세력까지 준비해 조광조 일파를 일거에 쓸어낸 것을 보면, 중종의 조광조 숙청 의지는 예전부터 확고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평범하게 정국을 돌보다가 벌레에게 파먹힌 나뭇잎 따위를 보고 홧김에 갑자기 결정한 숙청은 절대 아니라는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