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묘사화 (문단 편집) === 현대의 해석: [[중종]]의 친위 쿠데타 === >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중종|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이중인격|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 >---- >《[[중종실록]]》, 중종 14년(1519) 12월 16일 병자 2번째 [[http://sillok.history.go.kr/id/kka_11412016_002|기사]] 주초위왕 설이 사실상 허구로 밝혀진 지금, 기묘사화는 중종이 스스로 일으켰다는 게 정설이다. 실제로 기묘사화의 전개 과정을 보면 일반적 인식과는 다른 상황들이 나타난다. 우선 기묘사화 당시 실록 기사를 보면, 조정 회의에서 조광조에게 [[사형]]을 내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중종 단 한 명뿐'''이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광필]]은 물론이고, 사화의 주모자로 알려진 '''[[남곤]]'''도 조광조에게 사형을 내리는 데에는 반대했다. 이들은 조광조 일파도 아니었고, 오히려 조광조를 가장 강경하게 견제하던 세력들이었다.[* 조광조가 현량과를 시행하려 할 때 가장 앞장서서 반대한 자가 정광필과 남곤이다.] 조광조가 처음에 사형을 면하고 능성[* 현재의 [[화순군]] 능주면, 도곡면, 도암면, 이양면, 청풍면, 춘양면 일대에 있었던 옛 행정구역.]으로 귀양간 것도 남곤과 정광필이 결사적으로 반대한 덕이었다. 심지어 훗날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라는 명이 내려졌을 때 사관은 "정광필이 가장 슬퍼하였고 남곤 또한 슬퍼했다." 하고 기록했다. 훗날 권신이 되는 [[심정]], 이행 등도 조광조를 죽일 필요까진 없을 것이라며 사사에는 반대했고, 정책적으로는 조광조의 반대파이지만 대쪽 같은 [[정승]]이었던 정광필은 "신은 임금을 살육의 길로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저들은 조금도 삐뚤지 않은 사람들인데 어찌 죽음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언하면서 아예 모가지까지 내어놓고 중종을 만류했지만, 중종은 기어코 추가죄목을 찾아내 조광조를 죽였다. 따라서 기묘사화는 중종 자신의 의지로 일이 촉발되었고, 중종 스스로 밀어붙여 조광조를 [[숙청]]했다고 봐야한다. 중종이 이런 결심을 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는 제쳐두더라도, 세간에서 알고 있는 것처럼 기묘사화의 주역은 남곤이나 심정이 아니다. 실제 사건이 일어났던 중종 14년(1519) 11월에 대신들을 은밀히 소집한 것도 중종이고 이 자리에서 느닷없이 조광조에 대해 사형 판결을 내린 것도 중종 혼자 저지른 일이다. 특히 야밤에 미리 군 병력을 소집해 궁궐 내에 배치한 후 조광조 일파였던 [[승지]]들을 체포하고 임시 승지를 임명해 조광조 일당을 모조리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누가 봐도 '''[[친위 쿠데타]]'''의 모습이다. 아무리 권력의 핵심인 고위직 신하라고 해도 남곤, 심정 같은 신하가 '''군 병력을 소집해서 궁궐 내부로 불러들인다'''는 미친 행위를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왕을 끌어내리는 정변이나 역성혁명에서나 볼법한 일이지, 신하들 간의 파벌 싸움과는 한참 거리가 먼 상황인 것이다. 남곤이나 심정이 한 건 그냥 중종의 발표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것일 뿐이다. 중중과 훈구파 사이에 뭔가 뒷거래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훈구파가 주도하고 중종이 마지못해 허락한 모습은 절대 아니다. 그나마도 '조광조의 실각'에 지지를 보냈을 뿐이며, 위에서 언급했듯 중종이 조광조를 처형하려 하자 어떻게든 막으려 했던 인물들이었다. 거기다가 [[리더]]라고 불렸던 남곤은 사실 훈구파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인물이다.[* 서얼 출신인 [[유자광]]의 어머니가 [[노비]] 신분이라는 것을 언급해 유자광을 모욕했다는 설이 있기도 했다. 물론 유자광은 서얼 출신이라서 왕의 권세에만 기대야만 하는 처지라서 훈구파와도 겉도는 수밖에 없는 신세였지만.] 당시에는 훈구와 사림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딱딱 나뉘는 개념도 아니었다. 훈구 대신은 말 그대로 원훈들, 즉 정통 [[공신]] 가문 출신을 말하고, 사림은 개인의 [[학문]] 사조를 말하는 것이라서 충분히 겹칠 수도 있었다. 현대 정치로 비유하자면 훈구는 원로, 사림은 진보 정도로 볼 수 있다. 진보 세력에도 얼마든지 나이많고 경력도 오래된 원로 정치인이 있듯, 당시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남곤은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이라 공신 가문이지만 사림의 종장인 [[김종직]] 일파에 속했다. 그는 정통 관료 출신이면서도 사림 세력[* 남곤은 [[김종직]]의 제자이자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의 동문 겸 친구였다.]과 교류를 많이 한 사림 온건파에 가까웠으며, [[중종(조선)|중종]] 즉위 후에는 [[성희안]], [[박원종]] 등 기존 공신들과 대립각을 세웠고, [[나름]] 청렴하고 깨끗한 인물이기도 했다. 능력도 출중해 [[명나라]]로 보내는 외교 서신을 만드는 일도 이 사람 혼자 전담했다. 그리고 사림의 대표 주자로 여겨진 조광조도 개국공신 [[조온]]의 후손이며 명망 있는 가문이었기 때문에 가문을 기준으로 본다면 훈구에 속했다. 계파 분류상 겹친다는 점은 제외하고도 애초에 '''남곤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종이 두려워서 억지로 따른 티가 드러나는데, 정광필을 설득하라고 중종이 밀명을 내려도 정광필에게 가서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등 내심 찬성하지는 않지만, 병력까지 동원한 중종이 두려워서 소극적으로 따르며 방관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조광조를 진짜로 죽이려 드는 중종의 행동에 자신의 관직까지 사임할 각오로 적극적으로 반대하게 돌변하는데, 연산군 때의 사화가 다시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던 것으로 보인다.] 남곤이 조광조와 정치적으로 척을 졌음은 사실이었지만, 기묘사화 당시에 남곤은 '[[귀양]] 정도나 한 몇 년 정도만 있다가 돌아오겠지?'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의 실록 기록을 보면 남곤의 발언은 어느 순간부터 ~~기묘하게~~ 달라져 나중에는 조광조 일파로 보일 정도로 그들을 두둔하기에 이른다. 당시 남곤이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결국 기묘사화는 '''주연 중종, 조연 남곤·심정·홍경주, 피해자 조광조로 봐야 한다.''' 즉, 중종에 씐 유약한 이미지와 주초위왕 에피소드, 후대의 윤색이 섞이면서 주·조연이 바뀐 셈. 후대에 남곤, 심정 등이 기묘사화의 주역으로 남은 이유는 간단하다. 훗날 조광조는 [[문묘]]에 배향되면서 사실상 '조선판 유교 성인'의 위치로까지 추앙받았다. 따라서 당연히 조광조의 일생을 다루면서 그의 몰락하는 과정을 안 다룰 수가 없는데, 기묘사화의 주역을 중종이라고 인정해버리면, 중종은 '''문묘에 배향될 정도의 성현(聖賢)을 죽였다는 오점'''이 남는다. 중종의 체면과 이후 '''왕통의 정통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조광조를 신원하려면 누군가 그 책임을 대신 져야 했고''', 그것이 남곤과 심정이었기에 이 둘은 '주초위왕'이라는 낭설과 함께 모든 오명을 대신 뒤집어 쓴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