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묘사화 (문단 편집) ==== 후대의 윤색 ==== >당초에 남곤이 조광조 등에게 교류를 청하였으나 조광조 등이 허락하지 않자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甘汁)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놓아 갉아먹게 하기를 마치 한(漢)나라 공손(公孫)인 병이(病已)의 일처럼 자연적으로 생긴 것같이 하였다. 남곤의 집이 백악산(白岳山)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안의 어구(御溝)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고변(告變)하여 화를 조성하였다, 이 일은 《중종실록》에 누락된 것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략 기록하였다. >---- >《선조실록》, 선조 1년(1568) 9월 21일 2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na_10109021_002|#]] 주초위왕 일화는 당대 기록인 중종실록에는 없으며 '''50여 년이 지난 선조실록 1568년 기사'''에 뜬금없이 '남곤 등이 조광조를 모해한 전말'이라 하여 사관이 기록해 놓은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역모와 관련된 내용이면 미신이나 주술적인 요소도 빠짐없이 기록했기 때문에 당대에 기록되지 않은 것에서 이 이야기가 진짜인지 신빙성을 의심하고도 남으며, 후대에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관은 이 이야기를 저술하면서 중종실록에 누락된 내용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는데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일파에게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니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쟁은 [[흑색선전|없는 이야기도 지어내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다. 만약 주초위왕 사건이 정말 기묘사화의 시작이었다면 당대 중종과 신하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안 나왔을 수가 없고 실록에도 기록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밑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중종은 온 신하들이 다 반대하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기어코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다. 따라서 뜬소문으로라도 주초위왕 같은 말이 나돌았다면 중종 본인이라도 이야기를 꺼냈을 것이다. 왕조국가에서 '''왕이 된다는 참언'''만큼 죽이기 좋은 명분은 없다. 하지만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는 순간이나 투옥 이후 심문을 할 당시에는 비슷한 이야기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또한 실록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기묘사화를 현장에서 지켜보고 실록을 적던 사관들도 왕의 의중을 모르겠다며 매우 답답해하는 심정으로 실록을 서술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만약 그 자리에 '대궐에 글자가 새겨진 잎이 발견되었다.'느니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 같은 말이 조금이라도 나왔다면 사관이 적극적으로 적으면 적었지 이를 굳이 은폐할 이유는 없다.[* 조선을 비롯한 왕조국가에서는 자신이 연관된 적도 없는 역모 집단이 자신을 추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죽게 된 왕족들이 많았다. 그만큼 왕의 자리를 노린 죄는 무겁게 다스렸고, 당대 사람들에게 이는 숨을 쉬듯 당연한 패러다임이었다. 따라서 조광조에게 어떤 형태로든 '왕이 된다.'는 참언이 나돌았다면 조광조라는 인간의 죽음을 개인적으로 안타깝다고 여길 수는 있어도 사약을 받는 것 자체는 납득하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따라서 '주초위왕'은 조광조의 신원이 회복되고 '성현'으로 추앙받기 시작하는 선조 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봐야 한다. '주초위왕' 설이 나온 이유는 중종에게 성현을 숙청한 왕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지 않기 위함이었고 이는 왕실의 이미지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조선 왕조 내내 주초위왕 설이 정설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실제로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 시기, 조광조의 관직이 잠깐 회복되는 일이 있었고 이를 인종 사후 행장에 인종의 업적으로 실으려 하자 '이걸 적으면 인종에게는 업적이 되겠지만 중종에게는 위신이 깎이니 적지 말자.'는 주장이 나오면서 삭제된 바 있다.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007027_004|당시 실록 기사]] 이걸 기록한 사관은 업적으로 남겨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했는지 삭제한 내용을 실록에 주석으로 적어놨다.] 이후 주초위왕 이야기는 널리 퍼져서 조선시대 내내 정설처럼 통했고, 현대에도 한동안 진실처럼 여겨졌다. 이는 조선왕조가 무너진 이후에도 실록이 완역되기 전까지는 기묘사화 당대의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도 한동안 이 이야기는 사실인 줄 알았으나 거듭된 연구로 현재는 주초위왕은 허구이며 기묘사화는 중종 본인이 조광조 숙청을 목적으로 일으킨 친위 쿠데타라는 것이 정설이다. 왕조 이미지를 위해 후대에 윤색된 내용이 첨가되었다는 점에서 [[양녕대군/평가|양녕대군이 양보했다]]는 속설과도 일치하는 점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