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동사변 (문단 편집) === 일본의 노골적인 내정간섭 === 1935년 10월 30일, 관동군은 다롄에 중국 주둔군 사령관 타다, 참모본부 제2부장 [[오카무라 야스지]] 등을 불러들여 화북 분리 방침을 재확인, 상하이와 톈진의 일본군 장교들에게 이를 전달하여 화북분리에 박차를 가했다. 관동군은 톈진에서 중국인 유민과 한간들을 매수하여 화북인민자치회, 화북인민급진회 등 괴뢰단체들을 조직했고 10월 21일 하북성 향하현에서 만주국 군사고문과 일본인들이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1935년 8월 4일 하북성 정부 전구특경 제3총대장 유좌주가 난주에서 암살당한 난주 사건을 구실로 이것이 국민당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의 특무수류탄대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당고정전협정]]이 위반되었다고 베이핑 정무정리위원회 참의 도상명을 무단으로 체포하여 10일이나 감금했다. 이는 도상명이 행정감철전원 시절에 일본군의 요구를 거부한 원한 때문이었다. 중화민국 외교부의 엄중한 항의로 도상명은 석방되었으나 일본군부의 야욕은 그치지 않았다. 10월 29일, 주중 일본 대사관 부무관 다카하시, 중국 주둔군 참모 사카이 대좌[* 후일 중장까지 진급하고 1943년 예편하지만 [[중일전쟁]] 이후 국민정부의 손에 잡혀 처형된다.]가 하북성 주석 상진에게 난주 사건은 중국의 조직적인 항일 운동이라고 항의하면서 상진이 하북 각 기관을 대표해 유감의 뜻을 표하고 범인을 신속히 체포할 것이며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를 폐지하고 베이핑 시장 원량을 면직시키고 장래 반일, 반만 기관을 북상시키 말 것을 중앙에 권고하라고 요구했다. 국민정부는 이것이 내정간섭이라고 당연히 거부했다. 이에 11월 1일 밤, 다카하시와 나카이가 다시 상진을 방문해서 "당초 귀국 정부의 체면을 존중하여 짐짓 자주적인 실행을 권고한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 군은 즉시 자유행동으로 실현할 수밖에 없다."고 적반하장으로 위협했다. 결국 11월 3일 베이핑 시장 원량이 자발적으로 사직했고[* 후임은 친더춘.] 11월 26일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도 철폐되었다. 때마침 중화민국 11월 1일부터 [[법폐개혁]]에 들어가서 대대적인 경제개혁에 착수하고 있었다. 중국의 통일이 강화되어 간섭이 어려워질것을 우려한 일본은 이를 방해하고자 했으나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화폐개혁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이에 실망한 일본은 더욱 노골적인 간섭에 들어갔다. 다카하시는 다시 쑹저위안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협박했다. >"백은의 국유화와 현은의 상하이 집중은 화북경제를 궁지에 빠뜨려 일본의 이익을 방해한다. 만일 당신이 자주적으로 이를 방지하지 않으면 일본은 실력을 행사하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