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동사변 (문단 편집) === [[화북분리공작]] === 1935년 3월 30일, 관동군은 다음과 같은 대중국 정책을 결정했다. * 1. 화북 지역에 [[당고협정]] 및 부속 체결 사항 등에 의한 일본의 기득권을 신장하고 이로써 화북의 정권을 절대복종으로 이끈다. * 2. 화북 지역에 장래,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경제관계를 밀접하게 하기 위해 면, 철도 등의 산업개발 및 거래를 급속히 촉진시킨다. * 3. 서남 지역에 중앙 측에 대항할 수 있도록 물질적 원조를 비밀리에 행한다. * 4. 서남 지역에 장래 중국 남부의 경제계를 일본의 손에 넣기 위한 제일보로써, 필요한 경제적 설비를 시설한다. 관동군은 우선 중앙군과 국민당을 화북에서 철수시켜 화북을 진공상태로 만드는 것을 1단계로, 허수아비를 옹립하는 것을 2단계로, 마지막으로 일본이 화북 5성의 지도적 지위를 국민정부로부터 정식으로 받아내는 것을 3단계로 설립하고 1단계의 포석으로 [[하매 협정]]과 [[진토 협정]]을 체결했다. 2단계를 군벌 [[쑨촨팡]]의 포섭이 시도되었으나 쑨촨팡은 이를 거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죽인 시공빈의 딸 [[스젠차오]]에게 암살당했다. 하지만 일본은 포기하지 않고 1935년 6월 27일, [[우페이푸]]의 부하 백견무를 선동하여 베이핑 교외의 [[풍대 사건|풍대에서 폭동]]을 일으키게 했다. 하지만 하북성 주석 겸 진고 보안사령관 상진과 만복린이 이를 단호히 진압하고 북지청년동맹회를 해산해버렸다. 일본은 산서성의 [[옌시산]]에 대한 포섭을 시도하고 전 차하얼 주석이자 29군 군장인 쑹저위안, 산동성 정부주석 [[한푸쥐]], [[염계군벌]] 상진 등을 부추겨 중앙에 반기를 들게 하려 했지만 이들은 모두 일본에 아첨하면서 일본의 기대만 높이면서 정작 반장행동은 거부함으로 일본 군부를 열받게 했다. 1935년 7월 17일, 국민정부는 쑹저위안, 친더춘, 풍치안, 장자충, 유여명 등에게 청천백일장을 수여하여 크게 치하하고 행정원 베이핑 정무정리위원회를 해산하고 쑹저위안을 평진 위수사령에 임명하여 화북 사수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에 중국 주둔군 사령관 [[타다 하야오]] 소장[* 지금은 이렇게 깽판을 치지만 이래 봬도 [[중일전쟁]] 불확대파의 일원. 나중에 1937년 9월 참모본부 차장이 되는데 [[이시와라 간지]]의 매제이기도 하다.]은 9월 24일 [[타다 성명]]을 발표, "일중만 공존의 바탕이 될 화북의 안녕을 저해하는 국민당 및 장제스 정권을 화북에서 제거하기 위해서는 위력 행사도 부득이한 것 아닌가."라고 폭언하며 국민정부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에 일본 정부는 타다의 발언이 지나쳤음을 인정하고 이를 취소하게 했다. 일본의 등쌀에 이기지 못한 베이핑 정무정리위원회 위원장 황푸는 요양을 위해 베이핑을 떠나 사임해버렸고 8월에 베이핑 정무정리위원회도 폐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