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동사변 (문단 편집) == 배경 == 1931년의 [[만주사변]], 1932년의 [[제1차 상하이 사변]], 1933년의 [[열하사변]]을 거치면서 일본은 동북삼성과 열하를 점령하고 베이핑의 지척까지 전진했다. 1933년 [[당고정전협정]]의 체결로 일본의 전진은 일단 정지되었고 [[오카다 게이스케]] 내각이 출범하면서 대중유화론자 [[히로타 고키]]가 외무상에 취임, [[중일]] 사이에는 친선의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화북을 중국으로부터 분리하여 제2의 [[만주국]]을 수립해 장악하려는 [[관동군]]의 과격한 장령들의 도발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1935년 5월, 톈진의 일본 조계지에서 국권보 사장 호은부와 진성보 사장 겸 만주국 중앙통신사 기자 백유환이 암살당하는 하북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이를 구실로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 대리 위원장 [[허잉친]]을 찾아가 [[남의사]]가 암살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결국 허잉친은 허잉친-우메즈 협정이라 불리는 [[하매 협정]]을 체결하여 일본의 감시와 규찰을 용인했다. 이어 6월에 차하얼 성에 잠입한 일본군 특무기관원 4명이 체포된 장북사건을 구실로 일본은 [[쑹저위안]], [[친더춘]]을 위협해 친더춘-도이하라 협정이라 불리는 [[진토 협정]]을 체결, 쑹저위안의 철수와 배일기관 해산 등을 관철시켰다. 하매협정과 진토협정 모두 정식 군사협정이 아니라 통지에 불과했지만 일본은 이것이 정식 협정인 것처럼 선전하며 국민정부를 압박, 화북 분리공작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깽판을 저지해야 할 일본 외무성은 도리어 이런 현지 해결을 적극적으로 승인하며 부추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