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독교대한복음교회 (문단 편집) == 역사 == 최태용은,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923년, 조선에 돌아온 최태용은 한국 교회가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 Moffet, 1864~1939)의 영향 아래 장로회 위주의 근본주의화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부르짖었다. 그가 강조했던 교회개혁은 '''한국교회가 [[자유주의 신학|새로운 신학]][* 기독교대한복음교회에 신정통주의를 이식한 건 지동식 박사다. 이전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파들의 신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을 뜻했고, 이는 일본에서 대세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김재준, 송창근과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의 이종성은 미국 본토에 가서 신정통주의를 접한 사례다.]을 받아들이고,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는 한국인을 위한 교회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회개혁을 위하여 최태용이 한 일은 신앙잡지를 창간하고, 목사들을 설득해나가는 일이었다. 1926년부터 [[익산시]] [[금마면(익산)|금마]]에서 본격적인 부흥집회를 열었고, 최태용을 따르는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늘어갔다. 그러던 중, 1933년에 이들의 신학과 사상을 경계한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 오늘날의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의 전신이 되는 노회로 보는 인식이 있는데 사실은 오늘날의 기장, 통합, 합동이 고루 분포한 노회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시기 노회 임원들이 고신의 기원인 것은 맞다.]와 총회로부터 최태용을 지지하는 목회자들이 대거 면직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후에도 조선예수교장로회 지도부는 박형룡 목사 등을 중심으로 뭉쳐 [[김재준]] 등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실망한 최태용과 목사들은 1935년 10월 2일에 '''기독교조선복음교회''' 창립을 결의했고, 동년 12월 22일에 최태용이 목사 안수를 받고 초대 감독으로 취임한다. 교단에서 지금까지 사용하는 3대 표어도 교단 창설과 동시에 선포된 것이다. 교단 창립 이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강경하게 거부하였고, 그로 인해 많은 탄압을 받아 교단 해체 직전까지 갔었다. 일제에 대한 저항을 이어가던 중, 교단 설립자이자 초대 감독 최태용이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여 1942년 <동양지광>[* 친일반민족행위자 [[박희도(1889)|박희도]]가 창간한 친일 잡지. 1939년 창간, 1945년 폐간.]에 친일 사설을 기고하는 흑역사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2006년 1월 복음교단 정기총회에서 이에 대한 <죄책고백문>을 채택하여 반성했다. 해방 이후 최태용은 교단을 나가 사실상 정치인으로 전향했고, 6.25 전쟁 때 교단 감독을 포함해, 교단 창립동지들이 대거 인민군에게 납북 순교하는 일을 연달아 겪으며, 일제강점기 이후로 두 번째 교단 해체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부산으로 피난 온 교단 지도부의 노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66년에는 NCCK에 가입하여 정통교단으로 확실히 인정받았고,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서울복음교회 [[오충일]] 당시 담임목사와 총회장 조용술 목사 등을 중심으로, 교단 전체가 탄압을 무릅쓰고 군사독재에 항거했다. 1990년에는 조용술 목사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해 [[범민련]]의 창설에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런 역사 때문에 오늘날도 기독교대한복음교회는 민족주의와 사회참여를 강조하고 있으며, 교단의 취지에 동의하는 타 교단 출신의 평신도와 목사도 적잖이 유입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