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독교 (문단 편집) === 분열 === 기독교의 분열의 기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기독교의 공인 이후 [[삼위일체론]]을 중심으로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간의 신학 논쟁으로 [[아리우스파]]가, 5세기에는 안티오키아의 네스토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간의 신학 논쟁으로 인해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파의 종파가 정통파에서 갈라져 나왔다. 단성론파는 엄밀히 말하면 [[합성론]]파인데, 단성론은 예수에게 신성만이 있다고 보았지만 치릴로는 신성과 인성이 육화해서 하나의 본성으로 합쳐졌다고 보는 것이다. 정통파 교회는 서로마의 멸망 후 중세 초에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으나, 신학적, 정치적, 문화적인 다양한 문제로 인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양대 총대주교구를 중심으로 세력이 나뉘게 되었다. 7세기에 상대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고 했다. 신학적으로는 8세기 초 동로마 황제 [[레온 3세]]가 [[성상(조형물)|성상]]파괴령을 내리면서 양 교회의 사이가 더욱 벌어졌다.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황제의 성상파괴령을 단호히 거부했으며, 동로마 제국에서 한 세기가 넘은 내전 끝에 843년 동방에서 성상이 재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교회의 결합은 요원해 보였다. 정치적으로는 '포티우스 분열' 등의 사건이 발생했으며, 또한 동로마 제국이 내전에 시달리는 동안 로마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를 서방황제로 등극시킨 것은 두 교회 중심지의 골을 더욱 깊게 파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1054년, 양대 교회는 최종적으로 분리되었다. 이 사건을 교회의 대분열, 또는 [[동서 대분열]]이라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 [[필리오퀘]] 논쟁이로 단순하게 설명되곤 하지만, 필리오퀘 자체는 분열의 이유가 아니었다. 6세기 쯤이면 이미 라틴 교부 개개인의 견해를 넘어 서방의 지역 시노드들에서 채택되었으며 수백년간 동방에서도 이를 일치의 장애로 여기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개인들은 있었지만, 교회 일치의 면에서 필리오퀘는 결정적인 문제는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거룩한 그리스 교부들의 정식들은 설명될 수 있고 또 설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거룩한 라틴 교부들의 정식들을 비롯해 필리오퀘 역시 그렇게 설명되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각자가 지닌 고유한 독창성에 대해 온전히 존중하고 양측 간의 합의를 강조해야 한다. '''6세기를 기점으로 '필리오퀘'는 서방 전통 안으로 들어갔으며, 이는 교회 간의 일치가 다른 여러 동기로 인해 분열되기 전까지 결코 교회 일치의 장애물로 간주되지 않았다.''' >---- >-정교회 [[아드리아누폴리스]]{{{-2 (하드리아노폴리스)}}} 대주교 [[https://en.wikipedia.org/wiki/Damaskinos_(Papandreou)_of_Adrianople|다마스키노스]]{{{-2 ''Δαμασκηνός''}}}, 'Réflexions et perspectives et au sujet du rétablissement de la communion sacramentell', ''Oriente Cristiano'', 15 {{{-2 (1975)}}}, 7-25; cité dans ''Irénikon'' 48 {{{-2 (1975)}}}, p.219.[* 이 인용문은 가톨릭의 [[https://en.wikipedia.org/wiki/Yves_Congar|이브 콩가르]]{{{-2 ''Yves Congar''}}} 추기경의 저서인 [[https://www.catholicbook.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7961|《나는 성령을 믿나이다》]]{{{-2 ''Je crois en l'Esprit Saint''}}} 제3권에서 찬성과 함께 언급되었다.{{{-2 (본문의 인용문도 콩가르 추기경의 이 책 한국어판에서 그대로 발췌한 것이다.)}}} 정교회와 가톨릭의 이 두 주교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필리오퀘에 대한 논쟁은 동일한 신앙에 대한 두 표현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6세기엔 필리오퀘가 개별 교부의 견해를 넘어서 서방의 지역 시노드 차원에서 채택되었고, 동서방의 개별 교회들은 이를 친교 속에서 받아들였으며, 수백 년간 단죄되지 않았다. 가톨릭에선 필리오퀘에 대한 교의는 물론이고, 논쟁 그 자체도 동서분열의 결정적 원인이 아니라고 본다. 정교회의 경우 인용된 다마스키노스 대주교를 포함해서, [[https://ru.wikipedia.org/wiki/%D0%91%D0%BE%D0%BB%D0%BE%D1%82%D0%BE%D0%B2,_%D0%92%D0%B0%D1%81%D0%B8%D0%BB%D0%B8%D0%B9_%D0%92%D0%B0%D1%81%D0%B8%D0%BB%D1%8C%D0%B5%D0%B2%D0%B8%D1%87|바실리 볼로토프]]{{{-2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Болотов''}}}, [[https://en.wikipedia.org/wiki/Sergei_Bulgakov|세르게이 불가코프]]{{{-2 ''Серге́й Никола́евич Булга́ков''}}}, [[https://en.wikipedia.org/wiki/Paul_Evdokimov|파벨 에브도키모프]]{{{-2 ''Павел Николаевич Евдокимов''}}} 등의 성직자/신학자들이 필리오퀘 논쟁이 가톨릭과의 분열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본다.] 가령 동방 교부인 고백자 성 막시모스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는 성령"이라는 라틴 신학의 명제를 표현 차이로 보았고, 라틴 신학의 이 명제에 명시적으로 동의하였다. >물론 도시의 여왕(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사람들은 지극히 거룩하신 현 교황님의 시노드 서한을 공격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쓴 모든 장(章)들을 공격한 것은 아니고 그중에서 두 장만 공격했습니다. 하나는 (삼위일체) 신학으로 그들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은 또한 성자로부터도 자신의 발출{{{-2 (''ekporeuesthai'')}}}을 갖는다." 또 다른 하나는 신적 강생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로마인들)은 첫 번재 사안과 관련해서 만장일치로 라틴 교부들의 증언들을 제시했으며, 거기에 더해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가 성 요한의 복음에 대해 작업했던 거룩한 연구에 따라 그의 증언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여러 증언에 바탕을 두고 성자를 성령의 원인{{{-2 (''aition'')}}}으로 만들지 않은 점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ㅡ 실상, 그들은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의 유일한 원인이라는 점, 곧 한 분은 출산을 통해서 다른 한 분은 발출{{{-2 (''ekporesi'')}}}을 통해서 유일한 원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ㅡ 무엇보다도 그들은 성자를 통한 발출{{{-2 (''to dia autou proïenai'')}}}, 그리고 이를 통한 본질의 일치와 동일성을 입증했습니다. ··· 그러므로 그들{{{-2 (로마인들)}}}은 잘못 비난 받은 것들과 관련해서 비난당했습니다. ... 당신의 질문에 따라, 저는 로마인들이 자신들에게 고유한 것{{{-2 ("또한 성자로부터")}}}을 번역하도록 청했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서부터 유래할 수 있는 애매모호함을 피하게 했습니다. ... 그밖에 그들의 생각을 하나의 언어로, 그들의 모국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외국어로 표현할 수 없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 >-고백자 성 막시모스{{{-2 (AD 580-662)}}}, 키프로스의 사제 마리노스에게 보낸 편지{{{-2 (AD 655)}}}[* 번역은 Yves Congar 지음, 윤주현 옮김, 《나는 성령을 믿나이다》 제3권 113-114쪽에서 발췌.] 또한 로마 주교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의 교회정치적 경쟁 구도 역시도, 동로마 황제의 존재 때문에 어떻게든 중재가 되고 있었다. 후대인이 보기에는 동로마 황제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를 편들었을 것 같지만, 그건 분열 이후의 상황을 분열 전의 상황으로 소급해서 생각한 착각이다. 분열 전에는 로마 주교이든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이든 황제 입장에선 둘 다 정당한 주교이고, 오히려 '같은 도시'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를 견제하기 위해 로마 주교와 협력하곤 하였다. 즉 동서대분열의 원인은 '필리오퀘 논쟁 때문이다', '황제가 자기 도시 주교를 편들어서다'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미묘한 문제이다.[* 가령 교황의 실질 수위권 논쟁만 하더라도, 이미 1000년의 교회사 동안 쌓인 기존 사례들과 관습들이 있었기에, 양측 모두 이걸 어떻게 법적으로 표현할지의 생각은 달랐어도 나름대로 대화의 틀은 있었다.] 아무튼 1054년 로마 추기경들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하여 동서의 그리스도인이 분열된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대해 가톨릭은 정교가 가톨릭으로부터, 정교는 가톨릭이 정교로부터 분열되었다고 인식하기는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가톨릭 우위의 역사관이든 정교 우위의 역사관이든) 가톨릭과 정교가 분열 이전의 역사를 공유한다고 인식은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분열을 대(大) 분열로 만든 건 1054년 이후의 상황이다. 1054년의 상황에서 보자면, 주교들의 상호파문은 안타깝기는 해도 전에도 이 같은 일이 있었으니 전무후무한 일은 아니었다. '전에도 그랬듯이' 잠깐의 분열 후 화해를 했다면, '전에도 그랬듯이' 그냥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었다. 이 해프닝이 대(大) 분열이 된 건, 이후 화해를 하지 않고 장기화된 것에 있다. >양쪽 모두 완강했고, 특히 미하일 1세 키룰라리오스{{{-2 (Μιχαήλ Α΄ Κηρουλάριος)}}}[* 발췌자 주석: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라틴 성직자들을 의도적으로 도발했다. 그 결과 양 교회는 서로를 파문했다. 이전에도 이 같은 일이 있었으므로 이 사건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1054년의 분열은 확실한 균열을 남겼다. 상호 파문은 1964년에야 철회되었다. >----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2 ''Διονύσιος Σταθακόπουλος''}}}, 《비잔티움의 역사》{{{-2 ''A Short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최하늘 옮김, 더숲, 2023, 218쪽 가톨릭으로 대표되던 서방교회에서는 16세기에 [[면벌부]] 파동을 계기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사실 이 정도의 '종파분열'은 그때까지도 드물지 않게 있어왔지만 정치적 무력과 가톨릭 자체의 쇄신으로 저지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루터는 강력한 독일 제후들의 군사력을 등에 업고 있었고, 가톨릭 측은 이 신교를 쉽게 제압하지 못했다. 이 분열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대분단이 되었다. 이때 서방교회의 틀 안에서 하나를 이루던 교회는 [[가톨릭]](천주교)과 [[개신교]]로 분리된다. 이 분열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고 하여, 11세기의 동서 분열과는 용어에서부터 구분이 되는데, 상대적으로[* 물론 동서 분열에서도 [[필리오케 논쟁]]이라는 신학적 논쟁은 있었지만 루터의 경우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16세기 쪽의 경우 교의적인 차이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다만 개혁(reform)이라는 말에서 '진보' 혹은 '미래'를 떠올리는 현대인의 관념과는 달리, 루터가 지향한 것은 '원래의 그리스도교'이지 어떤 신생 교리가 아니었고, 바라본 것은 과거이지 미래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칼뱅도, 가톨릭도 전에는 없던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 의도가 없었고, 지향한 것은 '발견'이지 '발명'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을 '진보의 개신교 vs 보수의 가톨릭' 혹은 '원천을 찾는 개신교 vs 새로운 교리를 만드는 가톨릭'으로 파악해선 안된다는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