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기독교 (문단 편집) === 발전 === [[파일:기독교의 승리.jpg|width=300]] '''이교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 [[제우스]]를 비롯한 다신교 신들이 [[예수]]와 천사들의 군대를 피하여 어둠 속으로 도망가고 있다.][br](Le Triomphe du Christianisme sur le paganisme)''' 귀스타프 도레作 ----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로마 제국]]의 불안정 때문에 민중들의 종교적인 욕구는 늘어났고, 기독교 세력은 하층민들 중심으로 크게 팽창하였다.[* 상류층까지 기독교가 널리 퍼지게 된것은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의 일이다.] 사실 이전까지 기독교는 1~2세기 로마에서 아주 소수 종교 집단에 불과했다고 역사학자들은 판단하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서기 100년경, 제국 인구 6천만 중 기독교도들은 약 7000명~약 7500명 수준에 불과했다고 하며 이로부터 백년 후 [[세베루스 왕조]] 시대인 200년경에도 불과 20만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베루스 왕조가 붕괴하고 [[군인 황제 시대]]가 열린 250년경에는 순식간에 500만 명으로 늘었을 정도로 급속히 신자 수가 증가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인 200년대 말에 기독교들은 600만 명으로 추산되며 이는 제국 인구의 10%에 달했다.[*A 송혜경, 《사탄, 악마가 된 고발자》 207-210쪽 참고.] 이와 더불어 많은 황제들이 기독교에 대한 더욱 가혹한 탄압을 시도하였는데, 황제 중엔 셉티무스 세베루스(202년~211년), 막시미누스(235~238년), 발레리아누스(257년~260년)황제 등이 대표적으로 기독교회를 탄압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에 많은 황제들이 기독교를 탄압한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인 단합을 망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국가적인 행사 등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로마인들이 3세기의 위기 때 신전에 가서 울고불고 했을 때도 역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군인 황제들은 이들이 사회적인 단합을 해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이를 통해 다른 로마인들이 단결하길 바랐다. 또 이 시기 페르시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국교로 부흥하면서 페르시아 지방의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도 있었다. 특히 아르메니아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페르시아 황실의 핍박으로 서기 230년과 287년 박해 때 3만 명이나 죽임당하는 등 고초가 심했다. 참고로 이 시기에 '''기독교도들이 [[로마군]] 복무를 거부'''했기 때문에 군인의 수가 감소하여서 서로마제국을 쇠퇴시킨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는데(대표적으로 [[시오노 나나미]] 등) 이는 지나치게 과장된 해석이다. 기독교의 초기시대에는 평화주의에 따라 군복무를 거부하는 기독교인이 있긴 했지만 시대가 계속 흐르면서 군복무에 개의치 않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군에 입대했고, 군대에서 뛰어난 지휘관으로 활약했던 기독교도들도 많았다. 군인황제 시대가 끝난 후에 정권을 잡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역시 전례없이 강경한 기독교 탄압을 시도하였다.([[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사실 전임 황제였던 데키우스나 발레리아누스 황제도 강도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비슷했는데, 문제는 전임 두 황제는 일찍 비명횡사[* 데키우스 황제는 고트족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발레리아누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싸우다 포로로 잡힌다.]하는 바람에 탄압이 중단되었던 것. 반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오래 살았으므로 오랫동안 강력한 탄압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목적도 전임황제와 비슷하여 로마 사회의 단합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탄압이었다. 디로클레티아누스는 트라야누스처럼 "국가의례를 거부하는 기독교인 개인"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조직 자체"를 겨냥해서 파괴하려 하였다. 그 결과 기독교는 굉장히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중도에 퇴위하였고 그 결과 기독교 탄압도 애매하게 중단된다. [[파일:기독교_확장.png]] 서기 4세기~7세기 기독교의 확장. 어쨌거나 기독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만 해도 신도가 이전보다 매우 늘었다고 한들 본질적으로는 아직 제국민의 10% 정도가 신자에 불과한 제국의 비주류에 가까웠다. 본격적으로 기독교 교세가 증가한 것은 역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인한 기독교 공인 이후로, 이 시기부터 [[콘스탄티누스 왕조]]와 그들이 중용하여 황제가 된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테오도시우스 왕조]]에서 나온 기독교도 황제들의 기독교 진흥책에 힘입어 4세기 동안 기독교의 교세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덕분에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정한 [[테오도시우스 대제]] 시절인 4세기 말에 이르면 기독교인의 수는 30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제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기독교도가 된 셈이다. 학자들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개종하기 전까지 십 년마다 40%씩 교인 수가 증가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A 송혜경, 《사탄, 악마가 된 고발자》 207-210쪽 참고.] 지역적으로도 북서 아라비아, 페르시아만 연안과 크림 반도, 중앙 아시아, 켈트 지방까지 교세가 뻗어나간다. 각설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이어 즉위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면서 드디어 사회, 정치적 요인으로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합법 종교로 공인'''한다. 그가 공인한 목적은 기독교의 유일신을 섬기게 하고 로마 황제를 그 유일신과 신도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로 만들어 대중들에게 성인같은 위치로 공경받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황제를 신적인 위치로 숭배하는 것은 당시엔 낯선 것이 아니었는데 이는 이집트의 [[파라오]]나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샤한샤]])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로마 황제는 정식 직함이 아니었고, 공식적으로는 공화국인 로마에서 특권을 부여받은 편법적인 존재였으므로 어느 정도 신격화되긴 했지만 제국민들에게 신으로서 숭배받는 전통이 약했고 따라서 조금만 실책을 저지르면 즉시 암살당하고 내전이 발발하는 패턴이 계속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따라서 로마 황제를 아예 유일신인 [[야훼|하느님]]과 기독교 교회를 지키는 종교의 수호자로 만듦으로써 오리엔트에서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당시 나름 탄탄한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교리상으로도 유일신 개념을 가진 기독교가 로마 사회의 통합에 일조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기독교는 당대부터 자기네들끼리의 이단 논쟁에 휩쓸려 끊임없이 싸워댔기에, 예상과 달리 오히려 분열의 씨앗을 들인 셈이 됐다. 이들의 대립과 분열은 이후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부담을 안겨주었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군인황제 시대 때의 [[아우렐리아누스]]가 최초로 시도하였었다. 그는 기독교의 신이 아닌 '무적의 [[태양신]]'([[솔]] 인빅투스)을 내세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태양신보다는 기독교의 유일 신앙이 콘스탄티누스의 목적에 더 걸맞았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는 오랜 전통의 유대교와 사도 시대를 거치며 상당히 정교한 [[신학]]이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에 대해 꽤나 친숙하였고 따라서 기독교야말로 그의 목적에 걸맞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콘스탄티누스의 이 방식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의 대성공을 거두어 100년간 지속된 '황제 암살 → 내전 → 승자의 황제계승'의 패턴이 거짓말처럼 중단된다. 또 기독교를 공인한 경제적 이유로는 모라토리엄의 해결이 주 목적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 되어가고 있다. 즉 콘스탄티누스는 결국 기독교를 공인했으니 신전의 은닉금을 털 수 있었고 그 금으로 재무장한 군대와 경제를 안정시켰기 때문이다. 이때의 금화를 솔리두스라고 하며, 이를 위해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했다는 것.[* 물론 그렇다고 100% 순수하게 정치적 이유만으로 이용했다고 보기엔 어렵고, 아무리 낮춰잡아도 모친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대한 호감과 미미한 믿음 정도는 있었다고 여겨진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모친 따라 어릴 때부터 성당에 익숙하고 가끔 미사에도 나오지만, 딱히 열심하지도 않고 가끔씩은 점집도 가보는 널널한 믿음(?)을 가진 동네 아저씨 정도로 보면 얼추 맞을 것이다.] 참고로 콘스탄티누스는 죽을 때쯤 가서야 [[세례]]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저지른 모든 죄를 씻을 수 있고, 정적 살인 등의 죄를 지어야 하는 황제라는 점 때문이었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세례가 죄를 씻어 준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세례 이후 죄를 지었다면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봐야한다.] 실제로 이런 이유로 콘스탄티누스의 시절엔 세례를 죽기 직전에 받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현대에 저런 이유로 세례를 늦추는 건 말이 안되는 소리다. [[파일:십자고상 우상.jpg]] '''기독교의 승리''' 토마소 라우레티作 그 후 기독교는 4세기 중반 율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그리스 로마 신앙을 부흥시키는 정책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견제받기도 했으나[* 율리아누스는 361년에 기독교의 입김을 정치에서 완전히 제거하려 했으나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한 원정 중 전사하고 만다.] 훗날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가 니케아파 기독교를 제국의 '''국교로 선포'''했다(380년).[* 그 이전에 [[아르메니아]]가 서기 301년에, [[조지아]]가 337년, [[에티오피아]]([[악숨 왕국]])가 328년, 혹은 339년 국교로 선포했다.] 즉 기독교는 4세기 극초반의 디오클레티아누스 때에만 해도 박해받는 입장이다가, 불과 7~80년 정도 지난 4세기 말에 국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때부터 로마제국의 역사와 기독교의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었다.[*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3p, 원문: 'The history of Rome had become inextricably linked with the history of Christianity;'] 이에 따라 재미있게도 시리아에서 로마(비잔티움) 시대가 끝난 지 한참된 13세기의 시리아 기독교 측에서 남긴 기록에는 [[몽골 제국]]([[일 칸국]])의 [[훌라구]]를 새로운 콘스탄티누스로 묘사했던 기록도 있다고 한다. 훌라구가 [[바그다드]]를 함락시키는 등 이슬람 세계를 크게 약화시켜 시리아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권 한복판에서 박해받던 처지를 끝냈기 때문에[* 참고로 일 칸국이 1290년대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긴 했다.]([[적의 적은 나의 친구|훌라구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겠지만]]), 마치 옛날 로마가 이교(그리스 로마 전통종교)시절일 때 박해받다가 콘스탄티누스가 나타나 종교의 자유를 주어 박해를 끝낸 것에 비유한 것이다.[*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3p, 원문:'as a result, Syriac-speaking Christians were interested in Roman history regardless whether they were living under Roman rule.' In a thirteenth-century Syriac gospel lectionary,the pagan Mongol khan Hülägü could be portrayed as a new Constantine.'] 이후 로마 제국의 공적 영역은 급속도로 그리스도교화되며, 이교는 점차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다.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화는 대략 6세기에 거의 완료되었다. 다만 이를 단편적으로 파악해서, 이교도의 대대적 박해가 있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고대 다신교는 기본적으로 공적인 제사가 신심 활동의 핵심이고,[* 한 개인이 '믿음'을 통해 구원 받는다는 건 그리스도교 신학이지 고대 다신교의 신학이 아니다.] 고대 로마인에게 중요한 건 로마 건국신화 내러티브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시민이 함께 제사에 참여해서 공동체의 일치를 드러내는 공동 신심 행위였다. 따라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고, 다신교가 시민의 공동체적 일치의 자리를 교회에게 빼앗긴 순간, 박해 유무와 상관 없이 옛 다신교는 이미 실질적으로 끝장이 난 것이었다. >눈에 띄는 사건만 보고 제국 전체에서 이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으리라고 판단하는 것은 단편적이다. 그보다는 의례를 통해 공공 영역에 존재하던 고대 종교의 역할이 차츰 작아지며 종국에는 사라졌다는 것이 더 정확한 평가이다. >----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2 ''Διονύσιος Σταθακόπουλος''}}}, 《비잔티움의 역사》{{{-2 ''A Short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최하늘 옮김, 더숲, 2023, 80-81쪽 그리고 공적 영역에서의 교회의 위상은 이미 테오도시우스 이전에도 다신교를 압도하고 있었다. 당시 그리스도교 교회의 공적 기능에 대한 가장 큰 [[극찬]]은, 아니러니하게도 독실한 이교 신자였던[* 특히 유피테르를 믿었다.] [[율리아누스]] 황제에게서 나왔다. >'''무신론{{{-2 (=그리스도교)}}}이 조장되는 가장 큰 요인은 낯선 이에 대한 (교회의) 인간애와 죽은 이들을 위한 장례 주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무신론자인 갈릴레아 사람들은 자기네의 가난한 이들 외에 우리네의 가난한 이들까지 부양하고 있다. 우리네 가난한 이들에게는 사실 분명 우리들 자신의 보살핌이 모자란 것이다.''' >---- >-율리아누스, Epistola ad Arsacium[* 번역은 다음의 책에서 인용했다: 게르하르트 로핑크{{{-2 ''Gerhard Lohfink''}}},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2 ''Wie hat Jesus gemeinde gewollt?''}}},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1985, 270쪽] 물론 기독교 공인 이후에도 아직도 제국의 절반 이상 가량은 기독교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간간히 반기독교적인 반발은 종종 나왔으며 기독교를 완전히 로마의 국교화한 테오도시우스 황제조차 전 제국에 기독교 신앙을 실제적으로 국교화시킨건 [[프리기두스 전투]]로 마지막 이교도 황제인 [[에우게니우스]]를 죽이고 서로마의 반기독교 세력을 완전히 제압한, 그가 죽기 1년 전인 394년의 일이었다. 한편 그리스도교 내부의 이단 논쟁의 경우, 대체로 황제들은 대놓고 특정 노선의 편을 들기보다는, 갈등을 중재시키는 보호자로 인식되길 바랬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물론이고, 이후의 황제들의 신앙에서 나타나는 혼란이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가령 유스티니아누스는 칼케돈 공의회의 신학을 따랐지만, 황후 테오도라는 단성론을 지지했다. 이는 황제 부부가 신앙 문제에서 갈라졌다기보단, 황제 부부가 함께 갈등을 중재한다는 정치적 제스처였다. 아리우스파 역시도 니케아 공의회 이후 제국에서 박해를 받은 게 아니라, 거의 대등한 조건에서 삼위일체론과 경쟁했다. 당장 교부 성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주의와의 논쟁 때문에 황제에게 유배당한 게, 니케아 공의회{{{-2 (AD 325)}}} 이후 10년 지나서의 일이다.{{{-2 (AD 335)}}}] 아무튼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서유럽의 많은 국가들과, 기독교 국가로 온전히 남아 있던 [[동로마 제국]][*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동로마에서도 수세기 가량은 이신교 교리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테오도시우스의 이교 박해]] 참고.]을 중심으로 기독교는 번성하였고, [[프랑크족]]이 [[아타나시우스파]]의 [[클로비스 1세|세례를 받아들이고]], 그 프랑크족이 [[프랑크 왕국]]을 세움으로써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이후로도 미선교지역에 대한 선교는 계속 이루어졌는데 스칸디나비아 지방이나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은 아직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리투아니아]]는 14세기까지 이교도 국가로 남아있었고, 스칸디나비아 북부의 [[사미족]]은 [[19세기]]에 와서 기독교로 개종하기에 이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