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독교 (문단 편집) ==== 지옥 강하 ==== ||<-4>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ndrea di Bonaiuto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jpg|width=100%]]}}}|| ||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2 ''La discesa di Gesù agli inferi''}}} Andrea di Bonaiuto || >descendit ad inferos;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 >지옥에 내리사 사흗날에 죽은자 가운데로 다시 살으심[을 믿으며] {{{-2 (한국 가톨릭, 옛 번역[* 천주교요리문답])}}}[* 굳이 옛 번역을 인용한 이유는 직역된 것을 인용하기 위해서이다. 한국 가톨릭의 현행 번역에서는 '지옥' 대신 '저승'으로 희석하여 의역했으며, 한국 개신교에서는 아예 해당 부분을 삭제해버렸다.] >---- >He descended into hell {{{-2 (잉글랜드 국교회, Book of Common Prayer, 1662)}}} >---- >he descended into hell {{{-2 (미국 가톨릭)}}} >---- >사도신경 원시 그리스도론의 부활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로, 예수의 지옥 강하 교리가 일찍부터 성립되었고, 오늘날 교리로도 남아있다. 물론 이는 죄를 지었으니 지옥에 갔다는 의미는 아니며, 여기서 말하는 '지옥'은 협의의 의미{{{-2 (구원이 배제된 끝없는 형벌의 상태)}}}가 아니라 광의의 의미{{{-2 (하느님을 볼 수 없는 사후 상태, 곧 셔올)}}}이다.[* 현재의 한국 가톨릭과 개신교가 넓은 의미의 지옥을 각각 '저승'과 '음부'로 의역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이런 의역은 교리교육적으로 오해를 막는 장점은 있지만, 원문의 어감을 지나치게 희석시켜버리고 신학적 엄밀함을 떨어트리는 단점이 있다.] 곧, 예수가 죄 있어서 지옥에 간 게 아니라, 인간의 가장 비참한 상태인 '죽음'을 온전히 맛봄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였다고 보면 고대 교회의 확신에 부합한다. 예수의 이 '지옥 강하' 교리는 이미 신약 성경에서도 성립된 것이다. 바울로는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전하면서{{{-2 (참조: 로마 8,11; 10,9)}}} 예수가 '지하'로부터 올라왔다고 언급한다.{{{-2 (로마 10,7 참조)}}} ||<-2> 로마서 10장 7절 {{{-2 (AD 55-57년경)}}} || ||<-2> τοῦτ’ ἔστιν Χριστὸν ἐκ νεκρῶν ἀναγαγεῖν.[* tout estin Christon ek nekrōn anagagein.] ||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모시고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 || 가톨릭 새번역 || 개신교 새번역 || 또한 마태오 복음서가 묘사하는, 요나의 표징에 관한 예수 로기온{{{-2 (Jesu-Logion)}}} 역시도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에 대한 전거로 읽힌다. ||<-2> 마태오 복음서 12장 40절 {{{-2 (AD 80-90년경)}}} || ||<-2> ὥσπερ γὰρ ἦν Ἰωνᾶς ἐν τῇ κοιλίᾳ τοῦ κήτους τρεῖς ἡμέρας καὶ τρεῖς νύκτας, οὕτως ἔσται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ἐν τῇ καρδίᾳ τῆς γῆς τρεῖς ἡμέρας καὶ τρεῖς νύκτας.[* hōsper gar ēn Iōnās en tēi koiliāi tou kētous treis hēmeras kai treis nyktas, houtōs estai ho huios tou anthrōpou en tēi kardiāi tēs gēs treis hēmeras kai treis nyktas.] ||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 || || 가톨릭 새번역 || 개신교 새번역 || 무엇보다도 가장 유명한 것은, 베드로 1서의 다음 구절이다. ||<-2> 베드로 1서 3장 18-22절{{{-2 (AD 70-92년경)}}} || ||<-2> ^^18^^ὅτι καὶ Χριστὸς ἅπαξ περὶ ἁμαρτιῶν ἔπαθεν, δίκαιος ὑπὲρ ἀδίκων, ἵνα ὑμᾶς προσαγάγῃ τῷ θεῷ θανατωθεὶς μὲν σαρκί, ζῳοποιηθεὶς δὲ πνεύματι· ^^19^^ἐν ᾧ καὶ '''τοῖς ἐν φυλακῇ πνεύμασιν''' πορευθεὶς ἐκήρυξεν ^^20^^ἀπειθήσασίν ποτε, ὅτε ἀπεξεδέχετο ἡ τοῦ θεοῦ μακροθυμία ἐν ἡμέραις Νῶε κατασκευαζομένης κιβωτοῦ εἰς ἣν ὀλίγοι, τοῦτ’ ἔστιν ὀκτὼ ψυχαί, διεσώθησαν δι’ ὕδατος ^^21^^ὃ καὶ ὑμᾶς ἀντίτυπον νῦν σῴζει βάπτισμα, οὐ σαρκὸς ἀπόθεσις ῥύπου ἀλλὰ συνειδήσεως ἀγαθῆς ἐπερώτημα εἰς θεόν, δι’ ἀναστάσ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22^^ὅς ἐστιν ἐν δεξιᾷ τοῦ θεοῦ πορευθεὶς εἰς οὐρανὸν ὑποταγέντων αὐτῷ ἀγγέλων καὶ ἐξουσιῶν καὶ δυνάμεων.[* ^^18^^hoti kai Christos hapax peri hamartiōn epathen,dikaios hyper adikōn,hina hymās prosagagēi tōi theōi thanatōtheis men sarki,zōiopoiētheis de pneumati·^^19^^en hōi kai '''tois en phylakēi pneumasin''' poreutheis ekēryxen^^20^^apeithēsasin pote, hote apexedecheto hē tou theou makrothymia en hēmerais Nōe kataskeuazomenēs kibōtou eis hēn oligoi, tout estin oktō psychai, diesōthēsan di hydatos ^^21^^ho kai hymās antitypon nȳn sōizei baptisma, ou sarkos apothesis rhypou alla syneidēseōs agathēs eperōtēma eis theon, di anastaseōs Iēsou Christou ^^22^^hos estin en dexiāi tou theou poreutheis eis ouranon hypotagentōn autōi angelōn kai exousiōn kai dynameōn.] || ||^^18^^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19^^ 그리하여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시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20^^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21^^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데, 그분께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이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18^^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19^^그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 ^^20^^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지을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가 물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21^^그 물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6)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22^^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가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 || 가톨릭 새번역 || 개신교 새번역 || ||<-2> 베드로 1서 4장 5-6절 || ||<-2> ^^5^^οἳ ἀποδώσουσιν λόγον τῷ ἑτοίμως ἔχοντι κρῖναι ζῶντας καὶ νεκρούς. ^^6^^εἰς τοῦτο γὰρ καὶ νεκροῖς εὐηγγελίσθη, ἵνα κριθῶσιν μὲν κατὰ ἀνθρώπους σαρκί, ζῶσιν δὲ κατὰ θεὸν πνεύματι.[* ^^5^^hoi apodōsousin logon tōi hetoimōs echonti krīnai zōntas kai nekrous. ^^6^^eis touto gar kai nekrois euēngelisthē, hina krithōsin men kata anthrōpous sarki, zōsin de kata theon pneumati.] || ||^^5^^그들은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심판하시려고 준비를 갖추신 분께 셈을 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6^^그래서 죽은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들이 육으로는 다른 모든 사람처럼 심판을 받았지만, 영으로는 하느님처럼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5^^그들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분에게 사실을 죄다 아뢰어야 합니다. ^^6^^죽은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은, 그들이 육신으로는 모든 사람이 심판받는 대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 || 가톨릭 새번역 || 개신교 새번역 || 이 구절들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은 견해들이 갈리지만[* 가설①: 셔올의 의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다.[br]가설②: 셔올의 악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다.[br]가설③: 벌을 받는 천사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다.] 아무튼간에 결과적으론 죽음과 부활을 통한 예수의 구원 업적이 어디에나, 곧 '감옥'으로 표현된 지옥{{{-2 (셔올)}}}까지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신약 성경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지니는 구원론적 의미에 주안점을 두지만, 예수께서 저승에 가셨음과 이로써 그분이 죽은 이들의 세계에 들어가셨음을 분명히 증언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혁태. 〈예외 없는 희망? 발타살의 ‘지옥’ 담론과그 종말론적 귀결에 대한 고찰〉 신학전망 no.179(2012) : 91.] >사실 예수의 지옥 체험은 그분의 존재와 본질의 최종적인 내적 귀결일 수밖에 없다. 그분의 이타존재(Pro-existentia), 우리를 위하심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그분의 자기비움과 낮춤(Kenosis)이 어느 끝까지 이르는지, 그에 대한 결정적 대답이 바로 예수의 지옥에 내리심이기 때문이다. 이타존재로서 예수는 이 절대적 케노시스의 하강을 죽음이라는 깊은 심연 속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실현한다. 이로써 그분이 인간과 어느 지점에 이르기까지 연대하셨는지 하는 구원 경륜의 신비가 밝혀진다. 그분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어 인간과 연대하셨을 뿐만 아니라, 무덤에 묻힌 뒤의 현실이 가리키는 죽음 그 자체의 상태마저도 남김없이 맛보심으로써 인간의 운명을 당신 안에 받아들이신다. > >...예수의 지옥 체험은 따라서 온전히 죽은 이로서 죽은 이들에게 가심, 죽음의 상태 그 자체를 온전히 겪으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십자가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성금요일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곧 마지막으로 영을 아버지께 내어드림으로써(요한 19,30 참조)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 정점에 도달했다면, 이제 성토요일[* (발췌자 주석) 이 논문의 문맥에서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은 '십자가 죽는 것'과 '죽어있는 상태'를 각각 가리키는 표현이다. 곧 여기서 말하는 성토요일은 금요일 23시 59분 후의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죽어있는 예수를 의미한다.]에 그분은 죽은 다음의 죽음의 상태 그 자체를 남김없이 맛보셔야 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이제 인간의 가장 깊은 심연의 상태에 처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__예수의 이 지옥 체험은 밀도에서 보면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지옥을 질적으로 넘어선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하나이신 분이 체험하는 하느님 단절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단순히 죄인들이 자초한 지옥의 고통을 겪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 지옥 너머 그 아래에 있는 무엇을 겪으신다.”__[* (논문 내 주석)Hans Urs von Balthasar, ''Theodramatik'', Ⅳ, Einsiedeln: Johannes, 1983, 252] 그리고 그 너머의 무엇은 [[https://balthasarspeyr.org/life-and-mission/balthasar|발타살]]에 따르면, 임의의 어떤 상실이나 단절이 아니라 그 상실과 단절의 “본질적 근거”, “죄 자체”(Sünde an sich)[* (논문 내 주석)Hans Urs von Balthasar, “Von Balthasar antwortet Boros”, ''Orientierung'' 34, 1974, 38.]를 말한다. 여기에 예수의 지옥에 내리심이 갖는 유일무이한 특성이 있다.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감이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들만이, 아버지의 품에 계신 분으로서 십자가 죽음과 그 모든 귀결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다 비우신 아들만이 아신다.”[* (논문 내 주석)Hans Urs von Balthasar, “Die Schlüssel des Todes und der Hölle”, ''SKZ'' 14, 1969, 198.] > >...하느님의 아들이 지옥에 내리심으로써 신적인 구원을 인간 운명의 가장 깊은 심연에까지 가져오신다. 그분이 남김없이, 그 이상으로 하느님 상실, 하느님 부재의 자리에 서심으로써 그 자리가 이제 하느님께 이를 수 있는 열린 자리로 반전을 이룬다. >---- >김혁태. 〈예외 없는 희망? 발타살의 ‘지옥’ 담론과그 종말론적 귀결에 대한 고찰〉 신학전망 no.179(2012) : 9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