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기독교 (문단 편집) ==== 예수의 생애 ==== >Ἀρχὴ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θεοῦ.[* Archē tou euangeliou Iēsou Christou huiou theou.]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에우앙겔리온의 시작.''' >---- >-마르코 1장 1절(직역)[* 통상 '복음' 혹은 '기쁜 소식'으로 번역되는 에우앙겔리온은, 종교적으로는 구원{{{-2 (σωτηρία)}}}, 행운{{{-2 (τύχη)}}}을 가리키기도 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왕의 탄생 혹은 즉위를 가리키기도 했다. 또한 왕이 죄수를 사면하거나 유공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포상, 백성에게 베푸는 특혜나 선정{{{-2 (善政)}}}도 에우앙겔리온이라 했다. 가령 소아시아에 자리한 프리에네의 연감 비문은 주로 황제의 인물과 관련하여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번영을 비롯한 여러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br]'''"모든 삶을 주재하는 신은 당신의 섭리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분을 이러한 선물로 채우시면서 우리와 다가올 세대에게 구원자{{{-2 (sotēr)}}}로 보냈다. 그분은 모든 전쟁을 끝낼 것이며, 모든 것을 뛰어나게 이루어 낼 것이다. 그분이 나타남{{{-2 (epiphaneia)}}}으로써 선조들의 희망이 이루어졌다. 그분은 인간이 창조된 이후, 선행을 베푼 모든 이보다 훨씬 뛰어났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위대한 인물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황제께서 태어나신 날은 세상을 위한 '에우앙겔리온'{{{-2 (euangelion)}}}의 시작이었다. 이 에우앙겔리온은 황제 때문에 생겨났다."'''[br]곧, 1세기 교회는 예수를 단지 지혜의 스승이나 윤리 교사로 기억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로마의 공권력을 딱히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요 신'{{{-2 (dominus et deus / 수에토니우스 『도미티아누스 황제 전기』 13,1-2)}}}인 황제의 에우앙겔리온이 메아리치는 지중해 세계에서 황제의 위치를 상대화시키고는,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인 예수의 에우앙겔리온을 선포한 것이다.] 1세기 유대인 남성인 [[예수]]는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와 네 명의 형제들과 두 명 이상의 누이들이 있었다.[* 친형제 여부는 텍스트가 단편적이고 애매하여 단언하기 어렵지만, 일단 성경에서는 형제라는 말을 사용한다. 가톨릭과 정교회 신학에선 친형제가 아니라고 보고 개신교 신학에서는 대체로 친형제로 보지만, 꼭 교단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가령 가톨릭 신학자 John P. Meier는 "증거가 너무 적아서 절대적으로는 확신할 수 없다"{{{-2 ("Needless to say, all of these arguments, even when taken together, cannot produce absolute certitude in a matter for which there is so little evidence")}}}고 조심스럽게 언급하면서, 신약 텍스트만을 놓고 보면 친형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2 (《A Marginal Jew》. volume 1, Doubleday, 1991)}}} 한편 개신교 신학자들인 William David Davies와 Dale C. Allison은 마태오 13장의 형제들이 친형제가 아니라 본다.{{{-2 (W. D. Davies and Dale C. Allison J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tthew》 ,3 vols.;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Edinburgh: T. & T. Clark, {{{[}}}1988, 1991, 1997{{{]}}}, 2:458.)}}}] 그가 태어난 [[나자렛]]은 별볼일 없는 마을로, 유대 지방에 속하면서도 이방적인 색채가 강했다. 그의 가정은 가난하고 소외된 집안이었으며, 그는 장인이 되었는데 이는 보통 가난한 사람들의 직업이기도 했다. 예수의 성장 환경은 복음서상에 매우 단편적으로만 묘사되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텍스트상으로는 단지 유아 시절에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았으며{{{-2 (루가 2,21)}}}, 성장하면서 지혜도 자랐다{{{-2 (루가 2,40)}}}는 식의 기본적인 정보를 전할 뿐이다.[* 이러한 성장환경의 공백 때문에 현대에 각종 넘겨짚기들, 심지어는 [[예수 불자설]] 같은 유사역사학까지 붙지만, 결국 텍스트가 없기에 상상의 영역이다.] 예수의 본격적인 공생활은 [[세례자 요한]]과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네 복음서 모두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기점으로 예수의 본격적인 공생활을 서술하는데, 예수 역시도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의 제자인지, 혹은 제자는 아니지만 세례자 운동을 수용하고 그와 관계를 맺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예수는 한동안 세례자의 제자 동아리에 속했다는 주장이 있다. ...예수가 한동안 요한의 제자였다고 인정하는 데서 더욱 강력하게 발생하는 문제인즉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예수의 나중 활동이 세례자의 활동과 적지않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는 요한과 관계를 끊어 버렸거나 아니면 그에게서 어떤 특별한 하느님의 수임 또는 소명에 마주치게 되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두 경우 다 그러나 그런점을 가리키는 대목은 없다. 마르 1,10-11도 후자의 근거로 끌어들일 수는 없다. 확실히 예수도 심판을 고지했다. 그러나 예수의 심파설교는 독자적인 함축이 있고 하느님 나라 설교와 떨어질 수 없다.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의미로도 분리할 수 없다. 우리가 도달한 결론인즉 그러므로,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되, 그의 제자가 되지는 않고서 세례자 운동을 수용하고 그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https://www.bundobook.co.kr/goods/view?no=1701|《나자렛 예수》{{{-2 ''Jesus von Naz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요아힘 그닐카{{{-2 ''Joachim Gnilka''}}}, 정한교 번역, 111-113쪽.) 세례자 요한의 제자 여부 대해서는 요아힘 예레미야스{{{-2 (Joachim Jeremias)}}}의 ''Neutestamentliche Theologie. Erster Teil: Die Verkündigung Jesu'', Gütersloh ^^2^^1973,51-53을 참고하라.] 아무튼 확실한 건, 세례자 요한의 운동에 예수 역시도 진심어린 공감을 보였으며, 예수 역시도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것이다.{{{-2 (요한 3,22)}}} 다만 애초에 세례자 요한과의 관계가 어떠했든 간에, 세례자 요한과는 구분되는 독립된 활동으로서 예수 운동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메시지는 자주 단순화되지만, 이는 근대 시민윤리적 운동이나 심리치료로 환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며,[* 물론 예수의 메시지에 시민윤리나 심리치료 등의 요소는 존재한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 연구가 예수를 이러한 근대적 시민운동가나 심리치료사로 환원시키고 기적 이야기를 '덧붙여진 것', '없어도 되는 것'으로 희석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 연구에서는 더더욱 예수가 활동하던 1세기 팔레스티나의 문화 맥락을 중요시한다. 1세기 유다인 예수가 19세기 종교적 개인주의자처럼 생각했다는 발상부터가 역사학적으로 전혀 말이 안된다.] 반(反)율법주의나 종교적 개인주의, 윤리적 이완주의는 더더욱 아니었다. '''"예수는 유다인이었으며, 유다교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늘 관건이었다. 따라서 종교적 개인주의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사와 종교사 그리고 종교의 구조를 보더라도 그러했다."'''{{{-2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246쪽)}}} 물론 1세기 그리스도교가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사두가이)과 어느 정도의 긴장 관계를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바리사이 역시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바리사이들이 사두가이들과 긴장을 이루었다고 해서 바리사이를 성전 혐오자로 볼 수 없듯이, 예수{{{-2 (그리고 그의 제자들)}}} 역시도 성전 혐오자가 아니었고, 반율법주의자들도 아니었다. 클라우스 베르거(Klaus Berger)가 지적했듯이, "성전을 이스라엘의 심장으로 보는 사람만이 성전이 파괴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슬퍼할 수 있었다." >요한복음사가는 2장 17절에 시편 69, 10을 인용하며 예수가 성전에서 상인들을 몰아낸 일을 옳다고 평가한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제식을 맹렬히 비판하여 성전을 없애려 했고 성전제식을 모두 폐지하기를 원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말은 제식과 전례에 대한 거부감을 예수의 삶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예수가 한 번도 성전을 방문한 적이 없고{{{-2 (앞의 텍스트 외에 마르 12장 성전에서의 예수의 가르침 참조)}}} '성전 정화'{{{-2 (환전상과 가축 상인들을 몰아냄)}}}는 성전제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헌금이나 기부를 해야 할 거룩한 장소에서 돈을 긁어모으는 행위{{{-2 (가난한 과부의 헌금 대목[* 발췌자 주석: 이 부분에도 오해가 퍼져있는데, "이 텍스트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판하지 않는다. 주석가 중에는 예수가 과부를 사제들이 착취하는 희생양으로 묘사하려 했다고 여기는 이도 있다. 과부가 잘못된 가르침으로 오류에 빠져(!) 모든 것을 내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남는 것만 헌금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러나 텍스트에 그런 언급은 없다."{{{-2 (베르거, 같은 책, 169쪽)}}} "예수는 성전을 정화할 때 그곳에서 판치고 있던 장사꾼들을 몰아냈다. 성전은 돈을 긁어모으는 곳이 아니라 주는 곳인데, 그 가난한 과부가 성전에서 바로 그렇게 한 것이다. 사도 6장에 의하면 성전은 과부들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배급받는 곳이다. 이렇듯 자선을 청하고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바로 그곳에서 그 가난한 과부는 관계를 확 뒤집어 놓는다. 그녀는 모든 것을 내놓는다. 1베드 4,8과 잠언10,12 그리고 야고 5,20에 의하면 자선은 죄를 없앤다."{{{-2 (같은 책 169쪽)}}}] 참조)}}}를 금지한 것을 그렇게 왜곡한다. 이들 중 일부는 예수가 성전제식을 거부한 모습은 최후만찬 예식에서 극에 달했다는 주장까지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하느님께 속죄하는 새로운 희생양으로 세우기 위해 빵과 포도주에 대한 말로 성전제식을 폐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제식은 속죄 제물과 속죄의 날{{{-2 (욤 키퍼)}}}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런 주석은 전례와 '제식 규정'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유다교 전례에서도, 그리스도교 전례에서도 목표가 같은 한 가지 길이 다른 길을 자동적으로 막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두 갈래 길은 서로 나란히 있다. 그리고 두 가지 길을 잘 활용하면 영적으로 유익하다. 유다교에서는 죄의 사함은 기도나 성전에 제물을 바치는 일뿐 아니라, 자선 행위로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그대로 실행했다. 그러므로 대속을 위한 예수의 죽음이 그 자체로 성전의 역할을 없애리라는 뜻으로 여긴다면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히브리서도 예수가 이러한 이유로 대사제직과 하늘나라의 성전을 논증해야 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당연히 성전에 모였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평생 그곳에서 보냈다. >예수가 흘린 피{{{-2 (수많은 성전 제물 대신에)}}}가 죄 사함을 위한 것이었다고 믿는다면, 성전제식을 그 피의 상징이나 재현으로 볼 수 있고 본질적인 것의 모사{{{-2 模寫}}}로 인정할 수 있다{{{-2 (히브리서가 말한 대로)}}}. 요약하면, 에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소중히 여겼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대부분의 유다인들과 더불어 예수도 성전을 소중하게 여겼기에 심판한다는 말을 성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의미로 표현했다. 성전을 이스라엘의 심장으로 보는 사람만이 성전이 파괴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슬퍼할 수 있었다. 예수는 결코 성전과 제식을 반대한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예수도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스라엘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의 징조나 실제 상징으로 본 것이다. ...... 예수가 가시적 제식의 형상인 성인, 성전, 기도, 제물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예수는 예식을 거부한 계몽주의자가 아니다. 복음에는 예수가 제식을 폐지하고 윤리만 내세우는 대목이 없다. 물론 예루살렘이 예수에게 두 얼굴을 보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예루살렘에서 예언자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자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집이다.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예수는 성전도 당연히 사랑했다. >----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123-125쪽 >품위없는 것은 성전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느님과 상종하는 형태다. 그렇다면 예수의 행동은 의식변화를 부르짖는 열정적 호소, 회개의 호소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다른 제도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에 끼이게 되는데, 율법관행인 안식일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폐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뜻에 맞게 재생시키고자 한 것과 마찬가지다.[* (책 속 주석)참조: J. Roloff, ''Das Kerygma und der historische Jesus (Göttingen 1970) 96: "이렇게 성전에 대한 예수의 입장은 안식일 계명에 대한 그것과 정확히 부합한다."] >---- >-[[https://www.bundobook.co.kr/goods/view?no=1701|《나자렛 예수》{{{-2 (Jesus von Naz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요아힘 그닐카{{{-2 (Joachim Gnilka)}}}, 정한교 번역, 370쪽. 오히려 유다인 사회에 예수의 메시지가 준 충격은 이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이었다. 간단히 산상설교를 예시로 들어보자: >^^18^^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9^^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20^^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21^^'살인하지 마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 >...^^27^^'간음하지 마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 >...^^33^^"또 '거짓 맹세를 하지 마라. 그리고 주님께 맹세한 것은 다 지켜라.'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4^^'''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예 맹세를 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이다.|| > >...^^38^^'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40^^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 >...^^43^^'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 >---- >-마태오 5장 18-44절{{{-2 (공동번역)}}} 여기서는 윤리적 이완주의도, 반율법주의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는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보다 더 의로워지라고 요청하며, 결코 율법을 '더 널널하게' 해석하는 것도 아니다.[* 살인하지 마라 → 성내지도 마라 / 간음하지 마라 → 음욕을 품고 바라봐서도 안된다 / 거짓 맹세를 하지 마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마라 / 복수를 할 때는 니가 당한 것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 복수하지 마라 / 이웃을 사랑해라 → 원수도 사랑해라 ] 그리고 이런식으로 율법에 주석을 다는 것은 당대 율법학자들도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가 준 충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가 말을 하는 방식에 있다. 위 발췌문에서, 예수는 마치 자신이 시나이에서 율법을 준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인 것처럼 말을 하였다. "X라고 이르러진 말씀을[* 공동번역, 개역성경, 가톨릭새번역에서는 능동태{{{-2 ("..라고 하신 말씀")}}}로 번역했지만, 원문은 신적수동태{{{-2 (하느님을 직접 언급하지 않기 위해 수동태로 말하는 유다인 문화의 화법)}}}이다. 즉 예수의 화법에서는 시나이 율법을 입법한 주체로 분명히 하느님을 전제하고 있다.]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Y라고 말한다."라는 화법에서는 유다인 청중 누구나 예수가 스스로를 하느님의 위치에 놓고 있다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즉 예수가 준 충격의 관건은 율법에 해석을 달았다던지[* 이건 율법학자들도 했다.] 율법을 이완시켰다던지[* 복음서 텍스트 자체와 반대되는 오독이다.] 하는 게 아니다. 시나이에서 하느님이 주신 율법을 나자렛 사람 예수가 '하느님의 위치에서' 해석할 수 있느냐의 여부.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최고의회 의원들은 바로 이것을 정확히 간파했고, 단호하게 반대했다. 현대 유다교의 석학이자 라삐인 제이콥 뉴스너{{{-2 (Jacob Neusner)}}}도 정확히 이 점을 지적한다. 뉴스너는 그리스도교에 매우 신사적인 라삐인데, 그리스도교 신앙에 존경을 표하면서도 자신이 유다교 신자로 남은 이유를 저서 "A Rabbi Talks with Jesus: An Intermillennial, Interfaith Exchange"에서 다음과 표현했다. 이 저서에서, 뉴스너는 자신이 20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AD 1세기로 되돌아가 예수와 직접 이야기도 해보고 따라도 가봤다고 가정한다. 그는 예수를 하루 종일 따라다니다가 다른 유다인 동포와 함께 기도하고 토라 공부를 하기 위해 조그마한 어떤 도시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 도시의 어떤 라삐와 함께 예수에 관한 토론을 한다: >선생님이 물었다. '''"예수라는 학자가 그렇게 말하려고 했단 말이지?"''' >내가 말했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대충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무엇을 빠뜨렸지?"''' >내가 말했다.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탰지?"''' >내가 말했다. '''"자기 자신을 보탰습니다."''' >---- >제이콥 뉴스너{{{-2 ''Jacob Neusner''}}}, 『A Rabbi Talks with Jesus: An Intermillennial, Interfaith Exchange』, Dlubleday, 1993 즉 예수는 구약의 믿음에서 그 무엇도 빼지 않았다. 유다인 사회에 예수가 준 충격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으며, 토라를 하느님의 위치에서 해석하는 예수의 권한이야말로 정말 충격적인 것이었다. 비슷하게, [[예수의 성전 정화]]를 보자. 오늘날 이 사건은 "예수가 부패 성직자와 장사꾼들을 보고 분노한 사건" 정도로 단순화되지만[* 물론 예수가 당시 성전에서 벌어지는 실태를 반대한 것은 맞다. 하지만 사건을 이렇게 단순화시키는 것은 예수의 뜻도, 최고의회의 뜻도 간과하게 만든다.] 핵심이 되던 쟁점은 '예수의 권한'이었다. 공관복음서에서 성전 정화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맥락에서 서술되어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는 예루살렘 입성에서 메사아적 암시를 이미 하였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직접적으로 스스로를 '메시아'를 인정하는 장면이 더 뒤의 장면인 14장 61-62절에서야 나오지만, 예수가 메시아적 암시는 그 이전에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말해서 예수가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직접 입으로 발언했는지는 다소 모호하다. 그러나 예수의 사명의식이 메시아라는 주제로 잘 설명되는 건 맞다. 「예수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비록) 은폐된 방식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분은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분명하게 이 주장을 내세웠다. 다만 메시아로서의 그분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이라는 것도 밝혀 주었다.」{{{-2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Règne et Royaume de Dieu''》, R. Marlè 프랑스어 번역, Paris 1965, p.100)}}}] 그런데 바로 이 맥락에서[* 마태오와 루가에서는 입성 다음에 곧바로 일어난다. 마르코에서는 하루 뒤.] 예수는 마치 '''예루살렘의 왕권을 주장하듯이(!)''' 성전으로 향한다. >그분은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오해를 감수하셔야 했다. '''그러나 이 경우 오해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도시를 당신 소유로 삼는 것이 예수님에게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대한 입성은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그분의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도래하고 있다. 이 하느님의 다스림이 어디서나, 특히 수도 예루살렘에서 선포되어야 한다. 선포될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해, 하느님의 다스림을 대리하는 당신 자신을 통해 '표징 안에서' 현실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성전 정화도 필요한 것이다. 이 성전 정화는 바로 이 도시를 당신 소유로 차지하는 일과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갈릴레아에서의 활동 이후 이제 수도에서도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기 위해 예수님이 메시아로, 하느님의 다스림의 대리자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면, 그분이 성전을 제쳐놓으실 리 없다. 여기에도 옛 원칙이 통한다. '''곧, 임금이나 통치자가 성전 책임자라는 원칙이다.'''[* (책 속 주석)이 점은 [[https://de.wikipedia.org/wiki/Marius_Reiser|마리우스 라이저]]가 내게 지적해 주었다. 로마 지배 아래에서 자기 임의로 대사제를 해임하거나 임명했던 이들로는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영주, 퀴리니우스 시리아 총독, 로마 행정관들, 아그리파 1세와 2세, 칼키스의 헤로데 등이 있다. 임명권을 행사했던 이들의 인명에 따른 전체 목록은 [[https://en.wikipedia.org/wiki/Emil_Sch%C3%BCrer|E. Schürer]], ''The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Age of Jesus Christ(175 B..D.-A.D. 135)''. A New English Version revised and edited by G. Vermes, F. Millar and M. Black, Vol, II, Edinburgh 1979,229-232에서 찾아볼 수 있다. Josephus, ''Antiquitates'' 20,224-251 참조.] 따라서 입성과 연결된 성전 정화는 결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임금님이심을 예루살렘에서 선포하는 일에 성전의 모든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아니 최우선적으로 해당된다. 따라서 거의 필연적으로 성전 정화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 >-《예수 마음 코칭 - 평신도를 위한 역사 비평학》{{{-2 ''Jesus von Nazaret - Was er wollte, wer er war''}}}, 게르하르트 로핑크{{{-2 ''Gerhard Lohfink''}}} 씀, 김혁태 옮김, 435-437쪽 물론 예수는 정치적 의미의 메시아를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그러한 오해를 낳을 위험에도 불구하고 도성과 성전에 대한 어떤 왕권을(그러나 정치적 왕권이라 할 수 없는 종말론적 왕권을) 주장한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이 이 광대한 구역을 다 '정화'하시기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오늘날 주석가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행동'이란 말을 더 즐겨 쓴다. 시위적인 행동으로 예수님이 몇개의 탁자와 의자들을 둘러엎으시고 성전 구역을 가로질러 짐을 나르는 이들을 꾸짖으셨음이 분명하다. 그분의 행동은 하나의 표징일 수밖에 없었다. > >...'''예루살렘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두가이 사제 귀족층은 성전에 대한 자신들의 사고가 예수님에 의해 의문에 처해진다는 것을 아주 정확히 간파했다.''' 이미 토라를 둘러싼 갈등이 율법 해석의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듯이, 여기서도 성전 운영에 관한 주변부 문제들, 이를테면 '''환전상들과 비둘기 장수들이 성전 규역보다 도성 안에서 장사를 하는 게 낫지 않은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메시아|예루살렘의 예배를 온통 하느님 나라에 대한 당신 복음 선포의 빛에 비추어 판단할 수 있는 권한, 그리하여 이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예수님에게 있는지 여부]]가 쟁점이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 곧 이스라엘의 가장 권위 있는 종교 기구인 최고 의회가 정확히 이를 문제삼고, 단호히 부정한다.''' > >예수님은 성전 정화 행동을 통해 성전에 대한 전권을 주장하신다. 물론 적대자들은 이를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행동이 그분의 죽음을 불러일으켰음이 분명하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2 (마르 11,18)}}} >---- >-《예수 마음 코칭 - 평신도를 위한 역사 비평학》{{{-2 ''Jesus von Nazaret - Was er wollte, wer er war''}}}, 게르하르트 로핑크{{{-2 ''Gerhard Lohfink''}}} 씀, 김혁태 옮김, 438-442쪽. 그리고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어째서 예수가 정치범에게나 선고되는 십자가형을 당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로마 공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신전 모독자'이자[* 유다교는 엄연히 당시 로마 제국이 인정한 국가공인 종교였다. 로마인들은 유다인처럼 유일신을 믿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다신교 세계관을 통해서 나름대로 '이스라엘의 신' 야훼에게 경외심을 느꼈다.] 동시에 '도성 신전에 대한 관리권을 주장하는 왕 사칭자'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당국이, 또한 로마 당국도, 자기를 반대하는데 대한 마지막 수단으로 터트린 것이 성전 상거래에 공격을 감행한 저 성전저항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에게, 그중에도 특히 사두가이 파 대제관들에게 성전이 이스라엘 신심의 본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점령세력인 로마인들도 평정된 각 민족의 신들을 존중했고 따라서 야훼도 존중하여 성전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성전에서는 날마다 로마인들을 위한 기도가 있었고, 그런만큼 성전에 대항하는 예수의 그런 행동을 보자 그들 쪽에서도 예수를 체포하자는 대제관들 쪽의 요청에 응해 줄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 >-요아힘 그닐카{{{-2 (Joachim Gnilka)}}}, 방송 대담[* 1992년 5월 28일, 독일 Bayern 방송국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톤 켄테미히가 뮌헨 신약학자 요아힘 그닐카에게 묻는다」(Jesus, der Christus. Anton Kentemich befragt den Müncher Neutestamentler Joachim Gnilka)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던 대담. 번역은 요아힘 그닐카,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434-435쪽] 그렇기에 예수는 유다인들의 고발과 로마 공권력의 판결에 의해서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로서 처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