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대승 (문단 편집) == 여담 == * [[이황]]과는 12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아 8년 동안 [[사단칠정논변|사단칠정을 주제로 편지를 한 것]]이 유명했는데, 이는 유학 사상의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 [[장비]]의 [[장판파]]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였다. >지난번 장필무(張弼武)를 인견하실 때 전교하시기를 '장비(張飛)의 고함에 만군(萬軍)이 달아났다고 한 말은 정사(正史)에는 보이지 아니하는데 《[[삼국지연의]](三國志衍義)》에 있다고 들었다.'하였습니다. 이 책이 나온 지가 오래 되지 아니하여 소신은 아직 보지 못하였으나, 간혹 친구들에게 들으니 허망하고 터무니 없는 말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략) >---- >[[http://sillok.history.go.kr/id/kna_10206020_001|선조실록 3권, 선조 2년 6월 20일 임진 1번째 기사]] [[정사 삼국지]]에서도 이 장판파 이야기가 비슷하게 있으나, 정사에서는 20여 명을 이끌고 '덤빌테면 덤벼봐라'는 식으로 버텨서 수백~수천 명의 조조군이 감히 추격하지 못하게 하는 정도였고, 연의에서는 깃발과 먼지로 대군이 있는 것처럼 속인 뒤 '''고함소리'''로 아예 10만 명의 조조군을 '''도망'''가게 한 정도였으니 연의에서 어느 정도 과장한 게 맞다. 이를 두고 장판파 이야기를 허무맹랑하다고 깠다고 보는 이들이 있는데, 위의 인용문에서도 '''본인은 아직 보지 못하였고''' 다만 다른 사람들이 허무맹랑하다고 반응한 것을 언급했을 뿐이다. 또한, 장판파의 장비 이야기가 정사에 없다는 말은 기대승이 한 말이 아니라 선조가 한 말을 기대승이 인용한 것이다. [[삼국지연의]]가 한국에 유입된 것은 대략 16세기 초중반으로 추정하므로, 따끈따끈한(?) 신간의 내용을 두고 토론한 셈이다. 기대승이 '책이 나온 지가 오래되지 않아'라고 표현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실제로는 기대승이 위보다 삼국지를 언급한 내용이 더 많다. 본인은 주변 사람(지인)에게 들었다는데, 어쩌면 본인도 읽고 결말이 마음에 안들어서 기분이 안좋기에 안 읽은 척 하는 걸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사람(본인) 얘기 해줄게--[[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alternative_history&no=720946|#]] * 삼국지연의에 대하여 [[나관중|무뢰(無賴)한 자]]가 잡된 말을 모아 고담(古談)처럼 만들어 놓은 잡박(雜駁)하여 무익할 뿐 아니라 크게 의리를 해치는 소설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대의 꼬장꼬장한 선비인 기대승이 보기에는 격조있는 한시나 경전류와 비교해 잡기소설류가 천박해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삼국지연의는 모종강의 편집전이므로 관우가 승천하는 등의 부분이 있어 허황하고 터무니없다는 평가를 들을 여지가 컸다. * [[문재인]] 정권 [[대통령비서실]] 초대 방역기획관을 지냈던 [[기모란]] 교수가 [[https://www.hani.co.kr/arti/well/people/1041901.html|기대승의 후손]]이라고 한다. [[분류:광산구 출신 인물]][[분류:행주 기씨]][[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1527년 출생]][[분류:1572년 사망]][[분류:조선 광국공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