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관총 (문단 편집) === 기관총 개발의 역사적 의의 === >알량한 용기 따위, 훈련된 총알 앞에선 무력하다. >---- > [[조지 패튼]] 기관총은 인류 역사를 혁명적으로 뒤바꾼 최초의 [[대량살상무기]]이다. [[특허]] 제도를 바탕으로 기관총이 발명되자 공업국은 비공업국을 상대로 압도적인 화력 우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몇몇 열강들이 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식민지]]로 분할 점령하면서 [[제국주의]] 시대가 열리게 한 하나의 요인이 된다. 기관총 등장 이전까지는 아무리 발전된 총포류 화기라도 그 위력이 일당백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비공업국 군대가 [[머스킷]] 같은 뒤떨어진 총기를 사용하거나 심지어 창, 칼, 활 같은 [[냉병기]]를 사용하더라도 조직력, 규율, 인구(수적 우위), 보급, 지형, 매복/기습 등의 우위로 공업국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방어할 가능성이 있었다. [[병인양요]]나 [[신미양요]]를 보면, 수적으로도 밀렸던 조선군이 독하게 항전해 조선의 가성비(...)가 낮다는 것을 어필시켜 물러나게 하는 것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기관총이 개발되면서, 머스킷과 냉병기를 쓰는 비공업국의 군대가 기관총을 쓰는 공업국의 군대에게 이길 가능성은 극도로 희박, 아니 사실상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기관총을 운용하는 한두 명이 그렇지 않은 백여 명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쥘 수 있게 된 것이다. 기관총 앞에 선 비공업국 측의 군대가 가진 것이라고는 압도적인 수적 우세뿐이며, 이 이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근세 이전의 모든 전투가 그러했듯) 밀집대형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렇게 했다가는 기관총의 총알 폭풍에 차례차례 추풍낙엽처럼 갈려 나가는 참담한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험한 지형이나 현명한 전술 등에 힘입어 대대급의 서구 군대를 그럭저럭 막아내던 [[원주민]]의 근거지가, 단 한 정의 기관총으로 무장한 10여 명의 용병들에게 전멸하는 비극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이런 놀랄 만한 위력으로 인해, 기관총의 등장 초기엔 기관총의 운용 주체 자리를 놓고 [[보병]]과 [[포병]]이 서로 다투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기관총의 위력이 드러난 대표적 사례로 1893년 영국군과 마타벨레족 간의 전쟁을 들 수 있다. 고작 4정의 기관총을 보유한 영국군 50명에게 마타벨레족 5,000여 명이 쓸려 나갔고, 영국군에게 단 한 명의 마타벨레 전사도 달라붙지 못했다. 3년 뒤의 전쟁에서도 영국군은 400명의 전사자를 낸 반면, 마타벨레족은 무려 5만 명이 기관총 앞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다. 원주민들이 천재일우의 행운으로 잠깐 우세를 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유럽 국가들은 기관총을 지속적으로 개량시키며 [[대량생산]]했고, 더 발전된 기관총을 더 많이 싸들고 온 서구 군대에게 초토화되는 수밖에 없었다. 영국군이 기관총을 앞세워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정복한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자면 1899년 현재의 [[수단 공화국|수단]] 옴두르만에서 벌어진 옴두르만 전투에서 영국의 적이자 상대였던 [[마흐디 운동|마흐디 교단]]이 세운 마흐디국은 52,000여 명의 대군을 동원한 반면, 영국군의 병력은 6분의 1 수준인 8,700여 명이었다. 영국의 보호국인 [[이집트 왕국]]에서 지원받은 병력이 대략 18,000명 정도 더 있었다. 영국군이 사용한 맥심 기관총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여 마흐디 측에 사망자 1만 2천 명, 부상자 1만 3천 명, 포로 5천 명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대승을 거두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에 비해 영국군이 입은 피해는 겨우 47명 전사에 382명 부상. 마흐디 군사들 중에서 영국군 대열의 50미터 이내로 접근한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맥심 기관총의 위력은 강력했다. 추가로 옴두르만 전투는 [[덤덤탄]]을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한 전투인데 맥심 기관총의 위력, 그리고 방탄 장비의 부재라는 상황과 결합하여 효과가 아주 끝내줬다. 맥심 기관총으로 마흐디 교단을 사실상 궤멸시킨 영국은 1956년까지 수단 전체를 식민지로 지배했다. 이 옴두르만 전투에 훗날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총리가 되어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웠던 [[윈스턴 처칠]]도 일간지 모닝 포스트의 종군 기자이자 육군 장교의 신분으로 참가하였다. 처칠은 자신이 직접 옴두르만 전투를 목격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맥심 기관총에서 총탄이 발사될 때마다, 탄환이 수피 수도사들의 살을 꿰뚫고 뼈를 부숴 버렸다.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허둥거리다가 괴로워하며 죽어 갔다. 수피 수도사들의 시체는 마치 쓰레기들처럼 땅바닥에 형편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출처: 전쟁이 발명한 과학기술의 역사/ 도현신 지음/ 시대의창/ 337쪽] 게다가 기관총을 원정에 대동할 정도의 국력을 가진 제국주의 열강은 개인화기 차원에서 [[레버액션]] 소총 같은 연발 총기들을 도입하거나, 아예 고폭탄이 장전된 현대식 대포 및 그러한 함포를 장착한 철갑선을 끌고 오는 등 칼, 창, 활 같은 냉병기, 끽해야 화승총이나 플린트락 머스킷 같은 전장식 총기, 그리고 비폭발성 포탄이나 산탄을 발사해서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는 방식을 쓰는 구식 전장식 대포나 혹은 불랑기포 같은 초창기형 후장식 대포 같이 원시적인 화약 무기에 의존하는 약소국과는 차원이 다른 화력을 투사할 수 있었다. 괜히 [[포함외교]]라는 용어가 나온 것이 아니다. 1차 대전으로 전통적인 제국주의 자체가 망하기 전까지는 국력을 키우려는 나라들은 너도나도 이런 화력을 갖추러고 노력한 건 당연지사. 하지만 기관총을 다루던 예의 '문명국'들은 정작 '''이 무시무시한 기관총의 총구가 자기 자신들을 노릴 가능성'''을 제대로 생각해 보지 못했다. 사실 [[전차]]를 개발하기 이전인 이때로서는 한 번 자리를 잡은 기관총에 대한 대응책은 죽어라 포격을 하거나 앞서 기관총에게 쓸려나갔던 원주민들과 똑같이 목숨 걸고 [[닥돌]]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먼저 [[보어 전쟁]]에서 세계 최강 영국군이 한 줌의 [[보어인]]에게 고전하면서 기관총으로 무장한 백인들을 제압하기 힘들다는 것이 드러났고, [[러일전쟁]]에서도 [[일본군]]은 기관총의 무서움을 절감했다. 이 전쟁은 근대사의 변방에서 일어난 일이라 주목을 못 받았지만 결국 열강 간 초유의 [[총력전]]이 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쌍방 모두가 기관총을 본격적으로 쓰면서 그들 역시 자신들이 손쉽게 정복했던 원주민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고기인형 신세로 전락했고, 이는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와 더불어 [[참호전]]이라는 참혹한 결과로 끝나게 된다. 특히 인간의 인지도가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대다수의 지휘관들은 기관총의 총구 앞에 이전처럼 병사들을 [[전열보병|밀집대형]]으로 보내버리는 미친 짓을 저질렀고, 이는 [[솜 전투]]에서 단 하루 만에 무려 '''58,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함으로 인해 온 세상에 기관총의 위력을 똑똑히 보여주게 되었다. 기관총, 이후로도 발명될 정신나간 대량살상무기들의 등장 앞에 인간의 전쟁은 이전과 달리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하는 처참한 대량살상전으로 변화했으며, 기관총 발명 이전까지 전쟁사에서 특히 중요하게 여겨지던 [[전열보병|보병의 밀집대형]]은 의미를 완전히 상실했고, 병사 하나하나의 생존성을 중시한 산개와 엄폐, 기동을 강조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