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관총 (문단 편집) === 시초 === [[총]]이 등장하면서 인류는 더욱 정확하고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무기를 갖게 되었으나, 사격 속도가 느리다는 점은 아직 그 강력한 파괴력을 살리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이에 초기 [[핸드 캐논]] 시절부터 총신의 개수를 늘리거나 넣는 탄약의 수를 늘려 총의 부족한 연사력을 보충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있었고, 이는 머스킷이 등장한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나 긴 재장전 시간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는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큰 장점이 없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2.bp.blogspot.com/wheel_cannon.png|width=100%]]}}} || || 당시의 시도를 잘 보여주는 무기인 명나라의 차륜포 || 명나라엔 십안총과 삼안총이 있었는데, 십안총은 하나의 관에 10개의 구멍이 뚫려 있고, 각 구멍에 맞게 약선을 꽂은 뒤 화약과 탄환을 층층이 장전한 뒤 앞에서부터 불을 붙여 쏘는 기관총이었고, 삼안총은 3개의 총신을 한데 붙여 만든 핸드 캐논이다. 십안총의 경우 조선에도 유사한 구조의 쌍자총통([[승자총통]] 문서 참조)이 있었으나, 이런 구조의 총기들이 그렇듯 [[쿡 오프]]에 약하다 보니 오발사고가 잦아 잘 쓰이지 않았고, 삼안총의 경우 어느 정도 사용되었고 임란을 거치며 조선에도 들어오나 조총이 보급되면서 점차 주력에서 밀려나 나중에는 신호용 및 보조 화기가 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af5b8ea0aec2a3bf0be8dd870caf03c1945f34c1817eb160ab9e9eb74709d865.jpg|width=100%]]}}} || || 행주대첩기념관에 전시된 [[총통기|문종 총통 화차]]의 복원 모형 || 중세 한국에는 더욱 원시적 기관총과 유사한 무기가 실전 배치되어 사용되고 있었다. 바로 [[총통기]]를 장착한 [[화차(무기)|화차]]이다. 이 무기는 한번에 50발의 핸드캐논이 모조리 발포되는 것이 아니라, 지연 사격방식 때문에 수십 초 동안 각 총통이 전방을 향해서 지속적인 제압 효과를 발휘하면서, 총통 하나당 4발의 관통력 높은 화살을 끊임없이 쏘아냈다. 화살이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근접용 화포였기에 화약의 폭발 에너지를 손실 없이 근접한 적들에게 쏟아냈고, 작은 크기 때문에 현대의 돌격소총 탄환처럼 화약의 위력에 의한 지근거리에서의 관통력이 높았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차라리 [[활]]을 쓰는 게 더 나은 경우도 있었다. 당시의 총기는 강선이 없는 화승총 계열이었고, 사거리도 50미터 내외로 짧은 데다가, 명중률도 매우 낮았다. 화약의 경우는 젖을 경우 못 쓰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보급과 실전 사용의 어려움이 많았으며, 장전 시에도 일일이 정해진 양을 넣고 탄환을 넣고 쑤셔주는 등의 불편함이 있었다. 반면 활의 경우는 장전/조준/발사속도가 매우 빨랐고, 숙련된 궁수의 경우 명중률도 높았으며, 직사/곡사(엄폐물 뒤에서의 발사)가 모두 가능했으고, 사거리도 최대 500여 m에 달하는 등 어떤 전술을 구사하는가에 따라 총보다 유리한 경우도 있다. 이 시대 총기는 이런 단점으로 차라리 돌팔매질을 하는게 낫던 적도 있다. [[마젤란]]이 [[필리핀]]으로 총기 가지고 쳐들어갔다가 거리를 벌려 싸우는 현지 선주민들에게 16세기 초반 총이 별다른 위력을 못 보이고 오히려 이들의 돌팔매질에 당해 결국 마젤란도 끔살당한 바 있다. 이런 문제로 인해 아시아권은 총이 도입되고도 활이 제식 병기로 계속 사용되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총으로 무장한 부대를 활로 무장한 부대가 이기기도 했다. 이에 14세기 무렵부터 총기의 연사력을 높이려는 노력은 시작되었으나, 당시 기술로는 단순히 여러 개의 총기를 묶은 제사총(齊射銃)을 일제히, 혹은 순차적으로 발사하는 이상의 개선은 불가능했다. 당연하게도 이런 수준의 개선으로는 총기가 너무 무거워지고, 모든 탄환을 다 발사하면 재장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므로 휴대는 저 멀리 물 건너가고, 굳이 사용하려면 성벽이나 진지에 거치해놓고 대포처럼 사용하는 것 외에는 쓸만하게 사용할 방법이 없었다. 19세기 중엽, 탄약통(현대식 탄두 + [[탄피]] 형식 총탄의 전신)이 고안됨과 함께 오랜 숙원이던 재장전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러나 무기의 개발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고, 장전마저도 빨리, 많이 하려는 시도가 여러 번 이루어졌다. 이에 [[탄창]]이란 개념이 탄생하였고, 이 시스템을 기반으로 [[개틀링 기관총]]이나 [[가드너 기관총]], 노르덴펠트 속사포, 퍼클 기관포 등 수동 레버로 작동시키는 방식의 다양한 연사 무기가 고안되기도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XDlTDFP_HoQ)]}}} || || 당시 게틀링 건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동영상 || 하지만 기관총의 패러다임을 명확히 확립시킨 것은 1883년 개발된 [[하이럼 맥심|하이람 맥심]]의 반동이용식 기관총([[맥심 기관총]])이 최초라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